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69 정진구 마티아

69. 정진구 마티아 신부(1920-1950?)

 

정진구(鄭鎭求) 마티아 신부는 1920년 2월 16일 서울 어성동(현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 152번지에서 정치순 요셉과 천간난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34년 용산의 예수 성심 신학교에 입학한 뒤 소신학교 과정을 마쳤고, 1941년부터 1943년까지 일본 상지 대학(上智大學) 예과를 거쳐 영문학과에서 수학하였다. 이때 그는 잠시 성소가 흔들렸으나, 다시 사제가 되려는 뜻을 다잡고 귀국하여 덕원 신학교로 편입하였다. 덕원 신학교 시절에 정진구 마티아는 동료 최석호 바오로 신학생이 병석에 눕게 되자, 그를 간호해 주면서 그가 할 일을 대신해 줄 정도로 정이 많았다고 한다.

1945년 8⋅15 해방 이후, 정진구 마티아는 월남하여 천주 공교 신학교(1947년 4월 성신 대학으로 개칭)로 편입하였고, 1947년 10월 28일 학업을 모두 마치고 사제품을 받았다. 그런 다음 합덕 본당의 보좌로 임명되어 사목을 시작하였고, 1948년 7월에는 성가 기숙사 사감으로, 1949년 3월에는 동성 중학교 교사로 임명되어 종교 교육을 담당하였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였고, 사흘 뒤 6월 28일에는 북한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였다. 이날 노동당 정치 보위부원들이 동성 중학교로 정진구 마티아 신부를 찾아왔을 때, 그는 누님 정진숙 데레사가 숨겨 주어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 뒤 정진구 마티아 신부는 7월 15일부터 명동에 있는 교구청으로 가서 생활하다가 8월 6일 교구청이 용산 소신학교로 이전되면서 그도 함께 그곳으로 피신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의 신분을 성모 병원의 용산 분원 서무계장으로 위장하고 생활하였다.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 이후 인민군은 북으로 패주하면서 유력 인사들을 납치하거나 처형하기 시작하였다. 용산 소신학교에도 9월 17일 이른 새벽에 보안서원들이 들이닥쳤다. 이때 소신학생 강의순이 신부들의 방을 돌면서 이러한 사실을 알렸지만, 정진구 마티아 신부는 병원 서무계장이니 괜찮을 것이라고 말하며 피신하지 않았다. 결국 정진구 마티아 신부는 이재현 요셉 신부, 백남창 아가피토 신부와 함께 체포되어 도서실에 감금되었다가 어디론가 연행되었다.

그 뒤 신학생과 신자들은 정진구 마티아 신부와 동료 신부들의 행방을 수소문하였지만, 끝까지 종적을 알 수 없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들도 인민군에게 처형되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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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