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74 송은철 파트리치오

송은철(宋恩哲) 파트리치오는 1933년 5월 18일 평양 상수구리(현 평양시 중구역 만수동)에서 평양 보통학교 교사 송성화와 성모 보통학교 교사 정석인 아녜스의 외아들로 태어나 유아 세례를 받았다. 그에게는 누나가 하나 있었지만 일찍 죽었고, 일곱 살 때는 어머니마저 돌아가셔서 한약방을 하시는 외조부모 아래서 성장하게 되었다. 그는 말수가 적은 편이었고, 신자가 아닌 어린이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았으며, 성당 마당에서 혼자 놀곤 하였다고 한다.

송은철 파트리치오는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평양 제2 중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는 영어를 잘하셨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영어 공부를 좋아하였지만, 북한 공산 정권에서는 영어 공부를 금지하였으므로 비밀리에 개인 지도를 받기도 하였다. 그 뒤 그는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의 복사가 되어 한 살 아래였던 복사 김운삼 요셉과 함께 기림리(현 평양시 모란봉구역 개선동) 주교관에 거처하였다. 그는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비서 최항준 마티아 신부의 잔심부름을 맡아 일하면서 신학교에 입학할 기회를 기다렸다. 그러나 1948년 말부터 공산 정권의 교회 탄압이 본격화되면서 상황이 나날이 변하게 되었다.

1949년 5월 14일,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가 서포(현 평양시 형제산구역 서포1동)에 있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에서 첫 종신 서원 예정자와 면담을 하고 있을 때, 북한 노동당 내무상의 면담 통보가 관후리 주교좌성당(현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에 전달되었다. 이에 관후리 본당의 주임 겸 부감목인 김필현 루도비코 신부는 자동차를 빌려 타고 기림리 주교관으로 달려갔다. 그런 다음 그곳에서 홍용호 주교가 서포 수도원에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복사 김운삼 요셉에게 서포로 홍용호 주교에게 가서 “북한 내무상 박일우가 주교님과의 면담을 요청해 왔음”을 전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잠시 뒤에는 복사 송은철 파트리치오에게도 같은 심부름을 시켰다.

복사 송은철 파트리치오와 김운삼 요셉은 함께 서포 수도원에서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를 만나 김필현 루도비코 신부의 전갈을 전달하였다. 그런 다음 돌아가겠다고 하면서 수녀원을 나온 뒤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뒷날 확인된 바에 따르면, 송은철 파트리치오와 김운삼 요셉은 뒤따라온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함께 평양 시내로 돌아오던 길에 서포 감흥리(일명 가루게, 현 평양시 모란봉구역 진흥동)에서 정치 보위부원들에게 체포되어 정치 보위부 유치장을 거쳐 평양 인민 교화소에 수감되었다.

그 뒤 송은철 파트리치오와 김운삼 요셉은 노동당원들의 문초를 받을 때, “성당에 나가지 않겠다고 하면 집으로 돌려 보내 주겠다.”라는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켰고, 식사 때마다 성호를 그으며 자신들의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에 이미 송은철 파트리치오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거의 누워서 지냈고, 11월이 되면서 감방 안이 날로 추워지자 잦은 기침을 하면서 고통스럽게 생활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949년 12월(또는 1950년 1월)의 엄동설한에 동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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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