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79 조종국 마르코

79. 조종국 마르코(1896-1950?)

 

조종국(趙鍾國) 마르코는 1896년 5월 11일(음력 3월 29일) 서울에서 조경선(趙敬善)과 오정선(吳貞善)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나 열 살 되던 1906년 4월 14일에 세례를 받았다. 계성 학교(계성 초등학교의 전신)를 졸업한 조종국 마르코는 형과 함께 종로 네거리에 있던 화평당 약방에 취직해서 10여 년을 성실하게 일하였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던 약방 주인은 그를 자신의 사위로 삼은 뒤 약방의 모든 일을 맡겼다. 조종국 마르코는 이때부터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조선 매약 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는 대한 약행을 설립하는 등 한의학계에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조종국 마르코는 신앙생활도 열심이었고, 교회 봉사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특히 그는 명동 성당의 청년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가톨릭 청년 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고, 신심이 깊은 청년회원들과 함께 자주 만나 교리를 연구하고 토론하였다. 1938년 12월에는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여 프란치스코 성인의 모범을 따르면서 신심 함양에 힘썼고, 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에는 ‘조선 독립 촉성 종교 단체 연합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47년에 조중국 마르코 회장은 ‘종현 가톨릭 출판사’의 이사로 선임되었다. 이듬해 1월에는 ‘가톨릭 시국 대책 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으며, 1949년 3월에는 ‘남북통일 촉성 종교 단체 연합회’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서울교구장 노기남 바오로 주교의 권유에 따라 한국 민주당에도 가입하였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 뒤, 조종국 마르코 회장은 아내 이 데레사를 막내딸과 함께 피난시켰다. 그리고 자신은 셋째 딸 조현영 사비나와 함께 중풍으로 몸이 불편한 어머니를 모시고 다동 집(중구 다동 185번지)에 남았다. 공산 치하였음에도 조종국 마르코는 날마다 성당에 나가 미사에 참례하는 등 조금도 신앙생활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던 9월 16일 밤 10시가 지났을 때였다. 갑자기 군복 차림의 괴한들이 조종국 마르코 회장 집으로 들이닥쳐 그의 신분을 확인하고는 그를 체포하였다. 그러자 조종국 마르코 회장은 예상하였다는 듯이 담담히 성호를 긋고 그들을 따라나섰다. 당시 상황을 지켜보던 딸 조현영 사비나는 두려움 속에서도 아버지가 걱정되어 뒤를 따라갔지만, 그들의 위협에 놀라 집에 계신 할머니가 염려되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튿날 조현영 사비나는 다시 아버지의 옷을 싸 들고 사방으로 아버지의 소재를 알아보았지만 알 길이 없었다고 한다.

이처럼 조종국 마르코 회장이 피랍된 이유는, 일찍부터 활발한 교회 청년 활동은 물론 사회 활동을 통해 청년 신앙 활동의 중추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이름이 북한 노동당의 납치 요인 목록에 올랐던 것이다. 당시 조종국 마르코 회장이 끌려간 장소는 종로 소재의 YMCA 건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뒤 그가 언제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의 후손들은 조종국 마르코 회장이 다른 회장들과 함께 납북된 것이 분명하지만, 납치될 당시에 만성 맹장염을 앓고 있었던 탓에 곧 사망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본문 출처: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