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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 신부 사제서품 160주년 특집-가톨릭 신문
최양업 신부 사제서품 160주년 특집
 
양떼를 몹시도 사랑한 땀의 순교자
 
 
 
▲ 도앙골 교우촌 - 최양업 신부가 귀국하여 첫 서한(1850년 10월 1일)을 작성한 교우촌(부여군 내산면 금지1리) 사진제공 배티성지
 


▲ 불무골 교우촌 - 최양업 신부의 서한(1857년 9월 14일) 작성지(서천군 판교면 홍림2리) 사진제공 배티성지
 


▲ 오두재 - 서한(1858년 10월 3일) 작성지(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사진제공 배티성지
 

하느님의 종 최양업 신부의 사제서품 160주년.
 
한 세기 반이라는 오랜 시간이 흘렀다. 중국 상해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그는 한국 땅에 돌아와 멀고 먼 길을 걸으며 ‘백색 순교’를 했다.
 
피의 순교 대신 행한 ‘땀의 순교’. 최양업 신부만큼 오늘날 가져야 할 신앙인의 자세를 잘 말해주고 있는 이는 없다. 그가 사제로 다시 태어나던 1849년 4월 15일, 그의 사제서품의 의미를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최양업의 삶과 신앙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생으로 유명하다. 신학생으로 선발돼 중국과 마카오로 간 것은 같으나 이후 그들의 인생은 저마다 다르게 전개됐다.
 
1837년 마카오에 도착한 그들은 사제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지만 이중 최방제가 위열병으로 사망해버린 것이다. 1844년 12월 최양업과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함께 받는다.
 
여기까지 그들은 비슷한 운명을 함께 한다. 하지만 김대건 신부가 귀국로를 탐색, 페레올 주교와 조선으로 먼저 입국해 병오박해로 순교하면서 운명은 달라진다. 김대건 신부의 사제서품이 최양업 신부의 사제서품보다 ‘4년’ 앞서게 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본래 페레올 주교는 최양업을 먼저 사제품에 올릴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교회법상 나이 제한 때문에 사제품에 올리지 못했고 귀국로 개척의 경험이 있는 김대건을 조선 입국의 동반자로 결정하면서 그를 먼저 사제품에 올리게 되는 것이다.
 
최양업은 여러 차례 귀국로를 탐색하지만 결국 병오박해 소식을 듣게 됐으며 조선 교회 밀사들의 간곡한 만류에 따라 귀국을 포기한다.
 
귀국을 포기한 최양업은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가 이전돼 있던 홍콩으로 간다. 그는 프랑스 해군 라피에르 함장이 지휘하는 배를 타고 조선으로 갔으나 좌초함으로써 상해로 회항한다. 1849년 4월 15일 그는 당시 강남 대목구장 마레스카 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됐다.
 
그가 서품을 받고 ‘사제’가 된 것이다. 이로써 조선에는 김대건에 이어 최양업이라는 두 번째 목자가 생겼다. 최양업은 사제품을 받고 신부가 된 이후, 요동의 양관성당과 차쿠성당 일대를 사목한 후 1849년 12월 귀국했다.
 
이후 최양업은 페레올 주교의 명에 따라 동골 교우촌을 사목 거점으로 삼고 전국의 교우촌을 사목순방, 땀의 순교를 시작한다. 하지만 최신부가 순방한 교우촌의 이름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거나 그 지점에 대해 논란이 많은데 그가 박해의 위험 때문에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밝히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실로 ‘양떼를 사랑하는 목자’였다.
 
 
최양업 신앙의 의미
 
양업교회사연구소 소장 차기진 박사는 ‘최양업 영성의 의미’를 3가지로 요약했다. ▲ 끈질긴 신앙의 길을 가게 해주는 힘 ▲ 제삼천년기 복음화와 선교활동의 표상 ▲ 북방선교의 모퉁이돌이 되는 영성이다.
 
최양업 신부의 생애 가운데 우선 ‘사제서품’은 그가 올곧은 신앙의 길을 가게 해준 힘이었다. ‘신앙의 연속성’을 이어가게 해준 끈이었으며 사제의 삶에 용기를 넣어준 에너지였다.
 
차박사는 “끊이지 않는 신앙의 길을 간 최양업 신부의 삶은 자체로서 모범”이라며 “이같은 신앙의 힘은 오늘날 쉬는 교우들에게 많은 메시지를 준다”고 말했다.
 
원주교구 배론성지 주임 여진천 신부 또한 최양업의 사제서품에 대해 “부모님에게서 이어받은 최양업의 신앙이 사제품을 통해 더욱 구체화됐다”며 “막중한 사명감과 함께 사제로서의 열정을 뒷받침하는 계기였을 것”이라고 전했다.
 
또 “이러한 굳센 신앙의 바탕이 된 그의 ‘사제서품’은 오늘날 많은 신자들의 신앙 또한 굳게 해줄 것”이라고 덧붙였다.
 
최양업은 서품을 받고 사제가 되어 전국을 누비며 복음을 전했다. 사제서품에서 나온 그의 사목활동은 오늘날 선교의 표상이자 후손에게 남겨준 재산이다.
 
최양업의 사제서품은 서품을 받은 당시뿐 아니라 미래지향적 의미도 가지고 있다. 서품 직후 5월 그는 만주 대목구 선교사 베르뇌 주교의 보좌로 활동을 시작한다. 한국인 성직자로는 처음으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사목을 한 것이다. 최양업의 사제서품은 이처럼 오늘날 북방선교뿐 아니라 해외선교를 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어 넣고 있다.
 
특히 최양업 사제서품 160주년을 맞는 올해는 ‘최양업 신부와 124위 순교자 시복시성’ 법정 폐정식과 그동안 모은 자료를 교황청 시성성으로 보내는 시점이라 더욱 의미가 크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진행된 연구와 조사, 재판 등을 공식적으로 마무리하는 법정 폐정식은 5월 20일 열리며, 폐정식 이후 수합한 자료는 심사를 위해 시성성으로 보내진다.
 
 
“서품 장소는? 서품 주교는?”
최양업 신부 사제서품에 관한 의문들
 
 
2008년 12월 ‘교회사학’ 지에는 조현범 박사(한국교회사연구소 책임연구원)의 ‘중국 체류 시기 페레올 주교의 행적과 활동’이라는 논문이 실렸다.
 
이 논문에서 최양업 신부의 사제서품 장소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의견이 제기됐다.
 
지금까지 최양업 신부의 사제서품 장소는 중국 상해 서가회 신학원 내 성당으로 알려져 있었다. 가톨릭대사전도 “1849년 4월 15일 예수회의 강남 대목구장 마레스카 주교에 의해 신학원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됐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조박사는 논문에서 “최양업 신부의 서품식 장소는 (서가회 신학원 내 성당이 아닌) 장가루(張家樓, Tsang-ka-leu) 성당으로 추정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이러한 의견을 뒷받침하는 근거로는 ▲ 마레스카 주교 자신이 예수회원이 아니었던 만큼 마레스카 주교의 주교좌성당에서 거행됐을 가능성 ▲ 최양업에게 사제서품을 주었던 마레스카 주교가 같은 해 9월 11일 이탈리아 프란치스코 회원이었던 스펠타(Luigi Celestino Spelta, 1817~1862) 주교를 성성할 때 장가루 성당에서 성성식을 거행했다는 점 등이 있다.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 소장은 “마레스카 주교는 이탈리아 나폴리성가회 출신이었다”며 “서가회 성당의 완공년도와 최양업 신부의 서품년도 또한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만약 신부의 서품장소가 알려진 것과 다를 경우, 그동안 순례지로 여겨졌던 서가회성당에 대한 여러 가지 논란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 한 가지 의문점은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품까지 받은 김대건 신부에 비해 최양업 신부는 자신이 소속된 대목구장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지 않고 인접 교구의 교구장으로부터 사제품을 받은 점이다. 이에 관해 조박사는 ‘자료의 한계’로 더 이상 추적이 불가능하지만 아마도 조선 대목구장 직무대행의 자격으로 수품 허가서를 발급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최양업 신부 서품 160주년. 교회 안팎의 그에 대한 많은 조사와 연구가 절실하다.
 
[가톨릭신문, 2009년 4월 12일, 오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