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8년 말 | 제2대 조선교구장 앵배르 주교의 기해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 조사 시작: 순교자들의 행적을 포함한 수기 형식의 박해 보고서 작성 - 1838년 12월 31일부터 자신이 체포되기 3일전인 이듬해 8월 7일까지의 내용 수록 - 앵베르 주교는 체포되기 몇 개월 전부터 정하상 바오로, 현경련 베네딕다에게 순교 사적 정리 임무 부여 - 이문우 요한, 현석문 가롤로, 최영수 필립보 등에게도 같은 임무 부여 |
1839년 | 기해박해 정하상, 현경련, 이문우의 순교로 최영수, 현석문이 순교자들에 관한 자료 조사 작업을 맡게 됨 |
1841년 8월 | 최영수의 사망으로 현석문이 이재의 토마스, 최 베드로 등의 협조를 얻어 3년 동안 노력한 끝에 "기해년 치명일기" 완성 - <기해일기>의 원본 |
1844년 12월 | 김대건과 최양업이 페레올 주교에게 삭발례부터 부제품까지 받음 |
1845년 초 | 조선에 일시 귀국한 김대건 안드레아 부제는 <기해일기>를 토대 로 라틴어본 <조선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마카오의 리브와 신부에게 보냄 |
1845년 8월 17일 | 상하이 연안 김가항 성당에서 김대건 신부 사제 서품 |
1846년 | 병오박해 |
1846년 9월 16일 | 김대건 신부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 |
1847년 |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포함한 프랑스어본 “증보판 기해일기” 완성 - 홍콩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보내져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가 라틴어로 번역: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82명) 완성 |
1847년 10월 15일 | 번역 즉시 파리외방전교회에 보내진 자료는 교황청 예부성성(현 시성성)에 제출됨: 조선 순교자들의 시복 절차 본격적으로 시작됨 |
1849년 4월 15일 | 조선인 두 번째 사제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품 |
1856년 |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는 다블뤼 신부에게 교회 서적을 번역, 저술하라는 지시를 내림. 동시에 한국 순교자 전기를 편찬하도록 함 |
1857년 3월 25일 | 다블뤼 안 보좌 주교의 주교 성성식을 최초로 조선에서 거행 함 |
1857년 | 교황청으로부터 교황청 수속을 위한 조사를 시작하라는 통보를 받음 - 이를 시복 수속을 위해 순교자 명단을 새로 제출하라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여 1785~1846년 사이의 순교자 210명을 선정하여 <한국 주요 순교자 약전>(즉 다블뤼 비망기 제5권)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인 <한국 주요 순교자 선정>을 서둘러 완성 |
1857 ~ 1858년 | 박취득 라우렌시오와 윤지충 바오로의 순교 전기와 함께 <한국 주요 순교자 선정>을 파리로 보냄 |
1859년 | 위 자료의 <보유편> 120쪽을 추가하여 파리로 보냄 - 자료 수집 과정에서 다블뤼 주교는 황사영 알렉시오의 <백서> 가 수록되어 있는 이기경의 <벽위편>, 이순이 루갈다와 이경도 가롤로의 옥중 서한 발견 |
1862년 | - 다블뤼 주교는 자료 수집 작업을 계속하여 1860년까지 <조선사 서설>(즉 다블뤼 비망기 제3권>과 <조선 순교사> (즉 다블뤼 비 망기 제4권)을 완성한 뒤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로 보냄 |
1866년 | 병인박해 한국 순교자들에 대한 조사 작업 박해로 인해 중단 |
1876년 | 박해 후 기해 · 병오 순교자들에 관한 자료 조사와 정리 작업 재개. 이때 병인박해 순교자에 관한 조사도 병행됨 |
1880년 | 뮈텔 신부가 입국하면서 조사 작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짐 - 이때 신자들 사이에서 전해져 오던 <기해일기> 원본의 전사본 과 정하상의 <상재상서>, 그리고 민극가의 <삼세대의>와 이문우의 <옥중제성> 등의 천주 가사를 발견하여 교황청 예부성성으로 보냄 |
1887년 | 파리 본부에서는 다블뤼 주교가 작성한 자료들을 정리하여 전사본을 작성하는 한편, 이를 '다블뤼 비망기'로 분류함 |
1890년 8월 | 뮈텔 신부 제8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됨: 계속 자료 조사를 함 |
1894년 | 황사영의 <백서> 원본을 발견하였으며, 흩어져 있는 관변측 자료 들을 정리하여 추가함.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수집 정리된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에 관한 자료들은 시복 추진의 바탕이 됨 |
1847년 10월 15일 | 최양업 신부가 번역한 순교자들의 행적이 예부성성에 접수되면서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시복 절차 본격적으로 시작됨 - 이때 예부성성에서는 박해 중인 한국 천주교회의 실정을 감안하고, 이 행적 자료가 엄격하게 선정, 정리되었으므로 이것만으로 조사 수속이 가능하다고 판단함 |
1857년 9월 24일 | 교황 비오 9세의 윤허를 받고 한국 순교자에 대한 조사 심리를 위한 법령이 제정됨 - 이때부터 공식적으로 '하느님의 종'이라 불림 - 동시에 행적에 수록된 하느님의 종 82명 모두가 가경자로 선포 되고, 정규 절차에서 필요한 '정보 조사'의 면제라는 특권이 부여 됨 |
1861년 6월 15일 | 최양업 신부, 베르뇌 주교에게 사목 활동을 보고하기 위해 상경하던 중 장티푸스와 과로로 인해 선종 |
1864년 12월 23일 1866년 9월 17일 |
예부성성에서 시복 조사 위임장을 한국 교회로 발송하였으나 박해 때문에 전달되지 못함 |
1866년 | 병인박해 한국 순교자들에 대한 조사 작업 박해로 인해 중단 |
1869년 6월 25일 | 리델 신부가 순교한 4,5대 교구장을 이어 제6대 조선교구장에 임명됨 |
1879년 5월 8일 | 예부성성에서 한국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에 아무런 '장애가 없음' 을 선포 - 한국교회에서는 교구장의 주관 아래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조사 수속(교구 재판)의 절차와 교황청 수속(교황청 재판)의 절차를 동시에 시작 - 블랑 신부가 조사 수속위원회 판사를 맡음 |
1882년 | 제7대 조선교구장으로 블랑 신부 임명 |
1882년 4월 26일 | 뮈텔 신부가 위임 판사에, 로베르 신부가 기록 서기를 맡음 |
1882년 5월 11일 | 교회 재판 시작 |
1885년 | 뮈텔 신부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자로 임명되어 귀국: 푸아넬 신부가 시복 판사로 임명됨 |
1887년 4월 3일 | 교회 재판 종결. - 1882년 시작부터 종결까지 모두 42명의 목격 증인들이 나와 심문을 받음 |
1890년 8월 | 뮈텔 신부가 제8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됨 |
1899년 |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시복 판사로 임명된 르 장드르 신부가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들에 관한 증인 심문 내용을 확인 |
1901년 | 드망즈 신부와 뮈텔 주교가 다시 한 번 이를 검토 · 재확인함 |
1901년 10월 2일 | 삼성산(현 관악구 신림동 57-1번지)에 있던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의 유해 발굴 |
1901년 11월 2일 | 위 세 유해를 명동 성당 지하 묘지로 옮김 |
1905년 7월 26일 | "기해 · 병오박해 시복 조사 수속록"의 증언 내용을 라틴어로 번역하고 관련 자료를 첨부하여 예부성성에 제출 |
1910년 7월 | 교황청에서 수속록의 내용을 심의한 뒤, 그 적법성 즉 '교황청 수속의 유효성'을 발표함 |
1921년 | 교황청 추기경 회의의 첫 번째 단계인 前 예비회의를 개최 |
1923년 3월 | 예비회의 개최 |
1924년 | 순교 사실과 기적에 관해 심의하는 추기경 본회의를 계속함 - 이 과정에서 1924년에 하느님의 종 82명 중 17명이 증거 불충분으로 특별위원회에 회부됨 |
1925년 | 위의 증거 불충분으로 특별위원회에 회부된 17명 중 14명의 순교 사실이 추가로 인정됨 |
1925년 5월 10일 | 어전 회의(coram Sanctissimo) 즉 모든 문제를 재검토하는 투토(Tuto) 회의 개최 - 한국 순교자들에 대한 기적 심사 면제령과 함께 82명 중 정 아가다, 김 바르바라, 한 안나 등 3명을 제외한 79명의 시복 확정 |
1925년 7월 5일 | 로마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79위 시복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