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위 성인 연표

자료 및 예비조사

1876년 병인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 조사 시작
- 처음에 미미하게 진행되다가 1880년 뮈텔 신부의 조선 입국 후 활기를 띠게 됨
1882년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교황청 수속이 시작되면서 병인 순교자들의 시복 수속을 위한 예비 조사가 논의됨
1882년 3월 10일 블랑 부주교 갈매못 순교자 5명 중에서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장주기 요셉 등 4명의 유해를 남포의 서재골(현 미산면 평라리의 서짓골)에서 발굴하여 일본 나가사키로 옮김
1885년 뮈텔 신부가 프랑스로 귀국함에 따라 병인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조사 작업 일시 중단
1887년 조사 작업 재개
1890년 뮈텔 신부가 제8대 조선교구장에 임명되어 다시 한국에 입국하자 예비조사 작업이 본격화 됨
1895년 르 장드르 신부에 의해 조사, 정리된 병인박해 순교자 877명의 전기가 <치명일기>로 간행됨으로써 조사 수속 시작
- 뮈텔 주교는 <치명일기>가 간행된 후 이를 전국의 본당에 배포하여 보완 증거와 누락된 순교자들에 대한 전기를 추가로 수집

시복 과정

1899년 병인박해 순교자 조사위원회 구성: 르 장드르 신부를 위임 판사에, 한기근 바오로 신부를 시복 조사 청원자에, 홍병철 루카 부제를 서기로 임명
1899년 6월 19일 증인이 거주하는 지역별로 재판을 시작함
1899년 10월 30일 왜고개(현 용산구 한강로 3가)에 안장되어 있던 병인박해 순교자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신부, 볼리외 신부, 도리 신부, 프티 니콜라 신부, 푸르티에 신부, 우세영 알렉시오 등 7명의 유해가 용 산 신학교로 옮겨짐
1900년 9월 5일 왜고개에서 용산 신학교로 옮겨져 안치되었던 병인박해 순교자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신부, 볼리외 신부, 도리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 푸르티에 신부, 그리고 우세영 알렉시오 등 7명의 유해가 갈매못 순교자들의 유해와 함께 다시 명동 성당 지하 묘지로 옮겨짐
1900년 11월 30일 100명의 증인을 대상으로 135회에 걸쳐 이루어진 재판의 종결
1901년 병인박해 순교자 29위의 "병인 순교자 시복 조사 수속록"(전 10책)을 예부성성에 제출
1914년 5월 13일 예부성성에서 수속록을 검토한 뒤 이를 승인
1918년 11월 13일 교황 베네딕토 15세가 시복 건의 개시를 허락
- 이때 교황청에서는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시복 건을 코친 차이나 (현 베트남 남부) 순교자들의 시복 건과 한데 묶어 추진함
1919년 7월 29일

예부성성에서는 교황청 수속을 위한 교회 재판, 즉 교황청 재판을 서울교구에 위임
- 이때 29명 가운데 증거가 불충분한 이성천, 이성욱, 송성보 등이 하느님의 종에서 탈락되어 26명이 가경자로 확정
- 이후 교구장 뮈텔 주교는 2년 동안의 준비 기간을 거친 뒤 드브레 보좌 주교를 시복 판사로 임명

1921년 2월 12일~
1926년 3월 28일
129회에 걸쳐 85명의 증인들을 대상으로 교황청 재판이 열림
- 이 과정에서 1923년 2월에 김성학 알렉시오 신부에 의해 평양 논재(대동군 유리면 답현리)에 안장되어 있던 병인박해 순교자 유정률 베드로의 묘를 조사함
- 6~8월에 드브레 주교와 라크루 신부에 의해 고산 다리실(천호)과 전주 막고개(완주군 소양면 유상리), 진안 모시골(진안군 어은 동)에 묻혔다는 순교자 이명서 베드로와 손선지 베드로 등의 묘가 조사됨
- 드브레 주교는 그동안의 자료를 정리하여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현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을 완성
1925년 이 밖의 추가 증언 자료들을 모아 <병인박해 치명사적>(현 절두산 순교기념관 소장)으로 정리
1927년 5월 경기도 구산에서 복자 김성우 안토니오의 유해를 발굴하여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김
1928년 복자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유해를 수리산에서 발굴하여 김성우의 유해와 함께 명동 성당으로 옮김
1938년 시흥 봉천(현 서울 봉천동)에서 복녀 허계임 막달레나와 두 딸인 이정희 바르바라와 이영희 막달레나의 유해를 발굴하여 언구비 교회 묘지(현 서울시 논현동)로 이장
1952년 3월 2일 모두 8권으로 제책되어 교황청으로 보내진 교황청 재판 기록이 그 유효성을 인정받음
1962년 5월 4일 26위의 시복 수속이 코친 차이나 순교자들의 시복 건과 분리
1962년 11월 10일 제2차 바티칸 공희회에 참석한 한국 주교단은 교황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하느님의 종 26명이 병인순교 100주년이 되는 1966년에 시복될 수 있도록 청원함
1964년 파리외방전교회 경리부장의 요청으로 26명 중에서 푸르티에 신부가 제외됨
1965년 시성성 검사의 이의 제기
1966년 시복 청원인 단테(J. Dante) 변호사의 답변
1967년 1월 10일 추기경 회의의 前 예비회의에서 이를 근거로 프티니콜라 신부를 제외함으로써 하느님의 종은 24명으로 줄어들음
1968년 1월 30일 예비회의가 개최됨
1968년 2월 29일 교황 바오로 6세가 24위 순교 사실을 인정함
1968년 7월 4일 어전 회의에서 기적 심사 면제령이 반포됨
1968년 10월 6일 로마 베드로 대성전에서 24위 시복식 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