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생애를 소개합니다.
신학생 선발과 마카오 유학 | |
1821년 3월 1일 | 충청도 홍주 다래골의 새터(지금의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과 이성례(마리아) 복자의 장남으로 출생 * 아명은 양업(良業), 관명은 정구(鼎九) |
1827~1836년 초 | 부친을 따라 서울의 낙동(지금의 회현동 부근), 강원도 김성으로 이주했다가 부평 접프리에 정착 |
1836년 2월 6일 |
첫 번째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서울 후동(지금의 주교동)의 모방(나 베드로) 신부댁에 도착 |
1836년 12월 2일 | 동료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김대건(안드레아)과 함께 모방 신부 앞에서 순명과 복종을 서약 |
1836년 12월 3일 | 동료들과 함께 밀사 정하상(바오로), 조신철(가롤로) 등의 안내로 서울을 출발 |
1836년 12월 28일 | 중국 봉황성 변문 도착. 조선 입국을 기다리던 샤스탕(정 야고보) 신부와 상봉 |
1837년 6월 7일 |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 안의 조선교구(정식 명칭은 조선대목구) 신학교(임시)에 도착 |
1837년 11월 27일 |
동료 최방제, 위열병으로 사망 |
마닐라 피신과 마카오 귀환 | |
1839년 4월 6일 | 마카오 소요 때문에 부대표 리브와 신부, 칼르리 교장 신부 등과 함께 마닐라로 피신 |
1839년 4월 19일 | 마닐라 도착 |
1839년 5월 3일 | 도미니코회의 롤롬보이 농장으로 거처 이전 |
1839년 9월 12일 | 부친 최경환, 기해박해로 서울 포도청에서 옥사 순교 |
1839년 11월 말 | 마닐라를 거쳐 마카오로 귀환 |
1840년 1월 31일 | 모친 이성례(마리아), 서울 당고개에서 순교 |
1841년 11월 | 철학 과정 이수, 신학 과정 입문 |
1842년 2월 15일 | 동료 김대건(안드레아), 매스트르(이 요셉) 신부와 함께 프랑스 함대 에리곤호로 출발 |
마카오 출발과 소팔가자 도착 | |
1842년 7월 17일 | 만주 선교사 브뤼니에르 신부, 범 요한 신학생과 함께 프랑스 군함 파보리트호를 타고 마카오를 출발(1차 귀국로 탐색) |
1842년 8월 23일 | 상해 오송 항구에 도착, 며칠 뒤 매스트르 신부, 김대건과 상봉 |
1842년 9월 10일 | 프랑스 군함에서 하선 |
1842년 10월 12일 | 상해 베시 주교의 주선으로 브뤼니에르 신부, 매스트르 신부, 김대건, 범 요한 등과 함께 상해 출발 |
1842년 10월 22일 | 요동 반도의 남단인 태장하(지금의 요녕성 장하시) 해안에 도착 |
1842년 10월 25일 | 백가점(지금의 요녕성 장하시 용화산진) 교우촌의 두 요셉 회장 집에 유숙 |
1842년 11월 | 개주의 양관(지금의 요녕성 개주시 나가점) 교우촌을 거쳐 제3대 조선 교구장 페레올 주교(고 요한)가 있는 팔가자(지금의 길림성 장춘시 합륭진 소팔가자향) 교우촌에 도착 |
1843년 3월 | 동료 김대건 팔가자 도착. 그에게 부친 최경환(프란치스코)과 모친 이성례(마리아)의 순교 사실을 확인 |
1843년 12월 31일 | 페레올 주교의 성성식에 참석(개주 양관 성당) |
1844년 4월 | 1844년 2월 25일 이후 김대건은 팔가자-훈춘-경원(입국로)을 탐색 |
1844년 6월 2일경 | 최양업과 김대건, 팔가자에서 차부제 서품 |
1844년 4월~12월 | 신학 공부를 계속하면서 삭발례로부터 제 1~5품까지 받음. |
1844년 12월 10일경 | 최양업과 김대건, 팔가자에서 부제 서품 * 1845년 1월 1일: 김대건 부제, 조선 입국 성공 * 1845년 8월 17일: 김대건 부제,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 서품 후 조선으로 귀국 |
사제 서품, 귀국과 선종 | |
1846년 1월 말 | 조선 귀국을 위해 매스트르 신부와 훈춘 여행(2차 귀국로 탐색) |
1846년 2월 중순 |
훈춘의 동강자(추정) 마을에서 경원 개시(開市)를 기다리던 중, 만주 관헌에게 체포되었다가 3일 만에 석방됨. 팔가자로 귀환하여 신학생 지도 * 6월 5일 : 김대건 신부, 해로를 개척하던 중 순위도에서 체포되어 해주 감영,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됨 |
1846년 12월 말 |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변문으로 감(3차 귀국로 탐색) |
1847년 초 | 변문에서 병오박해 소식을 듣고, 홍콩으로 이전된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로 출발 '기해-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 |
1847년 7월 28일 |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라피에르 함장의 프랑스 군함을 타고 조선으로 출발(4차 귀국로 탐색, 1차 해로 탐색) |
1847년 8월 10일 | 고군산도(지금의 군산시 옥도면) 부근에서 난파하여 섬에 임시 상륙 |
1847년 8월 26일 | 상해 도착 후 서가회 안에 있던 예수회 신학원에서 수학 |
1849년 4월 15일 | 사백 주일에 상해 성당(장가루 성당 또는 김가항 성당이나 서가회 신학원)에서 사제 서품 (나폴리 성가회의 강남교구장 마레스카 주교 집전) |
1849년 5월 | 매스트로 신부와 함께 백령도 탐색 후 상해 귀환(5차 귀국로 탐색, 2차 해로 탐색) 요동의 차쿠 성당(지금의 요녕성 장하시 용화산진)으로 가서 베르뇌(장 시메온) 신부의 보좌로 사목 시작 |
1849년 11월 3일 | 매스트르 신부와 상봉 |
1849년 12월 말 | 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명에 따라 봉황성 변문으로 가서 귀국 시도(6차 귀국로 탐색) 매스트르 신부와 헤어져 단신으로 귀국에 성공(13년 만에 귀국) |
1850년 초 | 다블뤼 신부에게 가서 병자성사를 주고, 충청도로 가서 페레올 주교와 상봉 |
1850~1851년 | 진천 동골 교우촌(미상)에 거처를 두고 전국 다섯 개 도를 순방 |
1852년 8월 | 매스트르 신부, 고군산군도를 거쳐 조선 입국에 성공 |
1853년 여름 | 최양업 신부, 배티 조선교구 소신학교*의 지도 신부로 임명됨 (* 조선교구 소신학교: 다블뤼 교장 신부가 설립한 뒤, 1850년 9-10월 배티 교우촌에 새 교사를 마련함) |
1854년 3월 | 배티 소신학생 3명을 말레이시아 페낭 신학교로 유학 보냄 |
1859년 말 이전 | 전국 다섯 개 도를 순방하면서 신자들을 방문 |
1860년 9월 | 경신박해로 죽림 (지금의 울산시 상북면 이천리) 교우촌에 은거함 |
1861년 6월 15일 | 베르뇌 주교에게 보고차 상경하던 중 과로에 장티푸스가 겹쳐 충북 진천 또는 경북 문경에서 선종 |
1861년 11월 초 | 선종지에 가매장되었던 시신이 배론으로 옮겨져 안장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