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의 103위 시성식은 한국 천주교회의 큰 기쁨이요 영광이었다.
그러나 시성식이 끝난 직후 여러 신자들은 한 가지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토로하였다. 신해박해(1791)와 신유박해(1801)의 순교자들이 아직도 시복 시성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주교회의 200주년 기념 사업위원회와 각 교구에 의해 진행되었던 순교자들의 시복 시성 노력은 1997년 주교회의 추계 정기 총회에서 “통합 추진”이 결정되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관련 교구의 순교자 시복 시성 담당 사제들의 모임이 주교회의 사무처장 김종수 신부의 주재로 여러 차례 열린 끝에(1998-2000), 2001년 3월 주교회의 춘계 정기 총회는 시복 시성 통합 추진의 청구인(actor:추진 주체)을 ‘주교회의’로 명시하고 담당 주교에 마산교구장 박정일 미카엘 주교를 선출하였다.
신유박해 200주년 기념해인 2001년 10월 18일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한국 순교자들의 시복 안건을 통합적으로 추진해 온 결과, 2004년 7월 5일 시복 조사 법정을 개정하게 되었다. 이후의 과정은 증인들에 대한 소환 조사, 문서 증거 제출, 공적 경배가 없음을 조사하는 현장방문, 소송 기록물 공표, 보충 증거 제출, 번역문서 제출, 사본 작성과 문서 대조, 법정 종료이다. 법정은 총 36회기로 2009년 5월 20일에 폐정되었다. 이로써 한국 천주교회 차원의 시복 조사인 예비심사(제1심)가 마무리되었다. 이 시복 조사 문서들은 2009년 6월 3일에 시성성에 정식 접수되었다.
교황청 단계의 시복 절차(제2심)에서 시성성의 보고관(relator)을 중심으로 하느님의 종 124위의 생애의 성덕과 순교에 대한 심문요항(positio) 작업이 이루어졌다. 시복 안건의 최종 결정을 위해 작성하는 최종 심사 자료인 심문요항은 4년여 동안의 작업을 마친 뒤 2013년 3월 12일 시성성 역사전문가위원회와 10월 1일 시성성 신학위원회 심의를 각각 통과하였다. 그리고 2014년 2월 4일 시성성 추기경들과 주교들의 심의를 통과한 뒤, 2월 7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하느님의 종 124위의 시복을 결정한 시성성의 교령을 승인하였다.
마침내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천주교 신자들뿐 아니라 온 한국민이 큰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가운데 광화문 광장에서 시복 미사를 장엄하게 드리며 124위의 시복을 선포하였다. 103위 성인들의 조상들이 대거 포함된 하느님의 종 124위가 한국천주교회의 독자적인 추진으로 복자품에 올랐다. 그리고 새로 탄생한 124위 복자 기념일을 해마다 5월 29일에 거행하게 되었다.
앞으로 ‘복자 124위’가 시성이 되려면 기적이 필요하다. 124위 순교 복자들은 하나의 안건으로 묶여 있으므로 확실한 믿음으로 124위 순교 복자 전체에게 기적적 치유를 전구하여 구체적인 한 건의 기적이 확인되면 시성될 수 있다. 이에 주교회의에서 124위 순교 복자들의 시성을 위해 ‘124위 순교복자 호칭기도’를 제정하여 2014년 추계 정기총회에서 이를 승인하였다. 124위 순교복자들의 시성을 위해 신자들이 열심히 전구 기도를 바칠 필요가 있다.
* 박해별로 살펴본 하느님의 종 124위:
하느님의 종 124위는 1791년 신해박해 3위, 1795년 을묘박해 3위, 1797년 정사박해 8위, 1801년 신유박해 53위, 1814년의 1위, 1815년 을해박해 12위, 1819년의 2위, 1827년의 정해박해 4위, 1839년의 기해박해 18위, 1866년과 1868년의 병인-무진박해 19위, 1888년의 1위로 신유박해 전후의 순교자들이 시복 추진의 중심에 있다. 기해박해와 병인박해의 순교자들은 103위 성인의 추진 과정에 빠졌으나 순교 사실이 새롭게 연구되고 관련 지역에서 현양된 분들이 포함되게 되었다.
1791년 신해박해 3위 - 1791년 12월 8일 한국천주교회에서 첫 번째로 참수된 윤지충 바오로, 그 뒤를 이은 권상연 야고보는 전주 남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이로부터 2년 뒤 원시장 베드로는 충청도 홍주에서 매를 맞아 죽음으로써 순교하였다.
1795년 을묘박해 3위 - 윤유일 바오로와 최인길 마티아, 지황 사바는 주문모 신부를 보호하기 위하여 죽을 때까지 매를 맞으며 자신들의 목숨을 주님께 바쳤다.
1797년 정사박해 8위 - 정사박해로 인해 이도기 바오로는 1798년에 충청도 정산에서, 방 프란치스코와 박취득 라우렌시오는 1799년에 홍주에서, 정산필 베드로는 같은 해 덕산에서 순교하였다. 또한 1799년에 원시보 야고보, 1800년에는 배관겸 프란치스코가 청주에서 순교하였다. 인언민 마르티노와 이보현 프란치스코는 1800년에 해미에서 순교하게 된다.
1801년 신유박해 53위 - 124위 중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낳은 박해는 역시 신유박해이다. 이해 3월에 조용삼 베드로는 경기도 감영에서 옥사한다. 4월에는 최창현 요한,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최필공 토마스, 홍낙민 루카가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게 된다. 같은 날 처형된 이승훈 베드로는 아직 순교 사실에 대한 이론이 있으며, 그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연구가 끝나지 않아 현재 시복 대상에 빠져 있다.
같은 해 4월 최창주 마르첼리노, 이중배 마르티노, 원경도 요한는 경기도 여주에서 순교하며, 윤유오 야고보는 경기도 양근에서 순교한다. 5월에는 최필제 베드로, 윤운혜 루치아, 정복혜 칸디다, 정인혁 타데오, 정철상 가롤로가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다. 음력 4월 초에는 심아기 바르바라가 포도청에서 매를 맞아 순교한다. 1801년 5월 31일 조선의 선교사로서 첫 번째로 주문모 신부가 새남터에서 장렬하게 순교한다.
같은 해 7월 강완숙 골롬바, 강경복 수산나, 김현우 마태오, 문영인 비비안나, 김연이 율리아나, 이현 안토니오, 최인철 이냐시오, 한신애 아가타가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다. 윤점혜 아가타와 정순매 바르바라는 그해 7월 양근과 여주에서 각각 순교한다. 음력 5월에는 김이우 바르나바가 서울 포도청에서, 이국승 바오로가 공주에서 순교한다. 8월에는 김광옥 안드레아가 예산에서, 김정득 베드로가 대흥에서, 한정흠 스타니슬라오가 김제에서, 김천애 안드레아는 전주에서, 최여겸 마티아는 전라도 무장에서 순교한다.
같은 해 10월 김종교 프란치스코와 홍필주 필립보가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다. 같은 달 전주에서는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윤지헌 프란치스코가 순교한다. 11월에는 유중철 요한(이순이 루갈다와 동정부부)과 유문석 요한이 전주에서 순교하고, 12월에는 현계흠 바오로가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다.
1802년 1월(음력 1801년 12월)에 김사집 프란치스코가 청주에서 순교한다. 같은 달 손경윤 제르바시오, 이경도 가롤로, 김계완 시몬, 홍익만 안토니오가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다. 같은 달 정광수 바르나바는 여주에서, 한덕운 토마스는 남한산성에서, 황일광 시몬은 홍주에서, 홍인 레오는 포천에서 권상문 세바스티아노는 양근에서, 이순이 루갈다와 유중성 마태오는 전주에서 순교한다.
을해박해 직전인 1814년 12월 해미에서는 성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가 옥사한다.
1815년 을해 박해 12위 - 음력 4월에 김윤덕 아가타막달레나가, 음력 5월에 김시우 알렉시오와 최봉한 프란치스코가, 그해 말엽에는 서석봉 안드레아가 대구에서 순교한다. 김강이 시몬은 12월에 원주에서 순교한다. 김희성 프란치스코와 구성열 바르바라, 이시임 안나, 고성대 베드로와 고성운 요셉 형제, 김종한 안드레아와 김화춘 야고보가 대구에서 12월에 순교한다.
1819년 8월에는 조숙 베드로와 권 데레사 동정부부가 서울에서 참수되어 순교한다.
1827년 정해박해 4위 - 6월에 전주에서 이경언 바오로가 순교하고, 11월에는 박경화 바오로가 12월에는 김세박 암브로시오가 대구에서 옥사로 순교한다. 1835년에는 안군심 리카르도가 대구에서 옥사한다 .
1839년 기해박해 18위 - 5월에 대구에서 이재행 안드레아, 박사의 안드레아, 김사건 안드레아가 순교한다. 같은 달 전주에서 이일언 욥, 신태보 베드로, 이태권 베드로, 정태봉 바오로, 김대권 베드로가 순교한다. 9월에는 최해성 요한이 원주에서 순교한다. 10월에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11월에 심조이 바르바라가 전주에서 옥사한다. 12월에 이봉금 아나스타시아는 김조이의 어린 딸로 교수되어 순교한다. 같은 달 원주에서 최 비르지타가 교수되어 순교한다.
1840년 1월 홍재영 프로타시오, 최조이 바르바라, 이조이 막달레나, 오종례 야고보가 전주에서 순교한다. 최양업 신부의 모친 이성례 마리아는 같은 달 당고개에서 순교한다 .
1866년 병인박해 19위 - 3월에 청주에서 오반지 바오로가, 대구에서 신석복 마르코가 순교한다. 12월에는 공주에서 김원중 스테파노가 순교한다. 청주에서 순교한 장 토마스와 경상도 함안에서 순교한 구한선 타데오는 1866년 어느 달에 순교하였는지 확인되고 있지 않다. 병인박해는 가장 혹독한 박해였기 때문일 것이다.
1867년 1월에는 진주에서 정찬문 안토니오가, 통영에서 김기량 펠릭스베드로가, 상주에서 박상근 마티아가 순교한다. 같은 해 서울에서 순교한 송 베네딕토와 베드로, 이 안나 가족 순교자 역시 어느 달에 순교하였는지 확인되고 있지 않다.
1868년 여름에 동래에서 이정식 요한과 양재현 마르티노가 순교한다. 9월에는 이양등 베드로와 김종륜 루카, 허인백 야고보가 울산에서 순교한다. 같은 달 박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부부 순교자가 경기도 죽산에서 순교한다. 10월에는 박대식 빅토리노가 대구에서 순교한다.
1888년 4월에는 신앙의 자유가 생겼지만 지방의 인식 부족으로 진주에서 윤봉문 요셉이 순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