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위 복자 약전

No.67 유중성 마태오
유중성 마태오

67. 유중성 마태오 (1784?-1802)

 

‘완석’(完碩)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유중성(柳重誠) 마태오는 전라도 전주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아주 어렸을 때 집안의 장남이던 부친이 35세의 나이로 돌아가셔서, 그는 전주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 있는 작은아버지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집에서 자라게 되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 순교자 유중철 요한유문석 요한은 그의 사촌 형제들이다.

유 마태오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데에는 작은아버지 유 아우구스티노와 그 가족의 영향이 컸다. 실제로 유 아우구스티노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설립된 직후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가족과 친지들에게 널리 교리를 전하여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1801년 박해가 일어나자 유 마태오의 집안에서는 유 아우구스티노와 유 요한이 먼저 체포되었고, 그는 9월 중순 무렵에 어머니를 비롯하여 다른 친척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혔다. 그의 어머니는 체포된 지 얼마 안 있어 석방되었다. 그러나 유중성 마태오는 이순이 루갈다 등 다른 친척들과 함께 순교를 약속하면서 굳게 마음을 다졌다.

그러나 유 마태오와 친척들은 유배형을 받고, 함경도 회령으로 떠나게 되었다. 이때 유 마태오가 사촌 형수인 이 루갈다와 함께 친척들을 대표하여 ‘법에 따라 처형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유 마태오는 친척들과 유배지로 가는 동안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관장이 국법에 따라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지 않고 유배를 보냈다.”라고 외쳤다. 그러자 전주 감사는 그들을 다시 잡아오도록 하여 옥에 가두었다. 이후 유 마태오는, 다시 감사 앞에 끌려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고, 다음과 같은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였다.

 

“천주교는 집안에서 전해오던 신앙입니다. 유항검 등 삼촌들이 영광스럽게 죽었으므로 그들과 같이 죽기를 바랄 뿐입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감사는 결국 조정에 사형 판결을 요청하였고, 얼마 뒤에 임금의 윤허가 내려왔다. 이에 따라 유중성 마태오는 1802년 1월 31일(음력 1801년 12월 28일) 친척들과 함께 '숲정이'라고 불리는 전주 형장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의 나이는 약 18세가량이었다. 당시까지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출처: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2017. 10. 20. 제3판 1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