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박사의 안드레아 (1792-1839)
‘사심’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박사의(朴士儀) 안드레아는, 1827년 대구에서 순교한 박경화 바오로의 아들로, 충청도 홍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사의’는 그의 관명(冠名)이다.
박 안드레아가 태어났을 때 이미 그의 아버지는 천주교에 입교해 있었으며, 따라서 그는 집안의 신앙을 이어받으면서 성장하게 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박 안드레아의 신앙심은 깊어져만 갔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은 주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특히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이웃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그 뒤 박 안드레아는, 가족과 함께 충청도 단양의 가마기라는 곳으로 이주하여 살았는데, 이곳에서도 얼마 안 되어 그의 신심과 효성, 애긍 생활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그의 가족은 고향의 재산을 버리고 온 터라 가난하였지만, 교우들이 집으로 찾아오면 모두가 이를 마다하지 않고 정성껏 대접하였다.
1827년의 정해박해가 발생한 뒤, 박 안드레아는 가족과 함께 아버지를 따라 경상도 상주 멍에목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이해 4월 그믐경에 그의 가족은 교우들과 함께 주님 승천 대축일을 지내다가 상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상주로 끌려간 박 안드레아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인내와 용기를 보여 주었다. 그는 어떠한 위협과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증언한 뒤 대구로 압송되었다.
대구 감영에서도 박 안드레아는 여러 차례의 형벌을 신앙의 힘으로 참아 내었다. 반면에 노령인 아버지는 차츰 쇠약해지게 되었고, 이를 바라보는 그의 마음은 몹시 아플 수밖에 없었다. 이에 그는 관장에게 아버지를 보살펴드릴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관장은 이러한 효성에 감동하여 그들 부자를 함께 신문하였고, 옥에서도 함께 있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가 옥중에서 보여준 효행은 모든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이후로도 안드레아는 수많은 형벌과 옥중에서의 고통을 신앙의 힘으로 참아냈다. 그러나 아버지 바오로는 노령으로 인해 이를 끝까지 견디어내지 못하고 1827년 9월 옥중에서 순교하고 말았다.
당시 조정에서는 대구 감사의 사형 선고문을 받고서도 판결을 내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박 안드레아는 동료들과 함께 12년 동안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난 뒤, 다시 한번 배교 여부를 묻는 문초가 있었는데, 이때 임금에게 올려진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박사의는 천주교 교리를 배워 익혔으며, 마음을 다하여 이를 깊이 믿어왔으므로 법에 따라 처단하려고 합니다.”
1839년 5월 26일(음력 4월 14일), 안드레아는 마침내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그때 이들을 바라보는 죄수와 옥졸들은 모두 슬픔을 감추지 못하였는데, 이는 오랫동안 그들이 보여준 모범 때문이었다. 이후 포졸들은 그들의 시신을 수습한 뒤 예를 다하여 장사를 지내 주었으며, 신자들은 오랫동안 그들을 특별히 공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