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위 복자 약전

No.91 신태보 베드로
신태보 베드로

91. 신태보 베드로 (1769? -1839)

 

경기도의 용인 근처에서 태어난 신태보(申太甫) 베드로는, 1795년 무렵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신자가 되었다. 그의 집안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뒷날의 행적에서 미루어볼 때 그는 교육을 통해 어느 정도의 학식을 습득했던 것 같다. 1840년 전주에서 순교한 최조이 바르바라는 그의 며느리였다.

한국 천주교회가 설립된 지 10년이 지난 뒤, 사촌인 이여진 요한과 함께 입교한 신 베드로는 일찍부터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만나 성사를 받고자 하였지만, 신부가 워낙 비밀리에 활동하였던 탓에 만날 수가 없었다. 이후 신 베드로는 1801년의 신유박해가 끝난 뒤, 용인에 거주하던 순교자의 가족과 함께 강원도로 이주하여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그러다가 사촌 이 요한을 비롯하여 다른 교우들과 연락이 닿게 되자, 그들과 함께 교회 재건 운동을 의논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교우들이 가장 시급한 일로 생각한 것이 바로 북경에서 다시 성직자를 영입해 오는 일이었다. 그 결과, 1811년 말에 이 요한이 교우 한 명과 함께 북경으로 가서, 신자들의 서한 두 통을 전하게 되었다.

조선 신자들의 성직자 영입 운동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그때마다 베드로는 이를 위한 경비를 마련하는 데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신자들의 희망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신 베드로는 영혼을 구하는 일에 힘쓰기로 작정하고, 여러 지역을 전전하며 생활하다가 경상도 상주의 잣골에 정착하여 은둔 생활을 하였다. 그동안 그는 교회 서적을 필사하여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곤 하였다.

1827년 전라도에서 정해박해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신 베드로는 자신이 살던 곳에서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그는 가족과 함께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전주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상주의 포졸들과 함께 잣골로 들이닥쳤다. 당시 포졸들은 이미 체포된 신자들을 통해 교회 서적을 필사하여 나누어 준 사실과 그의 거주지를 알고 있었다.

신 베드로는 이내 전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뒷날 그 자신이 샤스탕(St. J. Chastan, 鄭) 신부의 명에 따라 기록한 '옥중 수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에서 다음의 내용은, 그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 했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내 다리는 살이 헤어져서 뼈가 드러나 보였으며, 앉을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내 상처는 곪아서 참을 수 없는 악취를 풍겼다. 더욱이 내 방은 벌레와 이투성이였으므로 아무도 내게 근접할 용기를 내지 못하였다. 다행히 건강한 몇몇 교우들이 부축을 해주어 몸을 좀 움직일 수가 있었는데, 그들은 가끔 내 방을 치워주기도 하였다. 이 애덕의 행위를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이처럼 형벌을 당하면서도 신태보 베드로는 결코 교회 서적과 동료들이 있는 곳을 밀고하지 않았다. 또 관장이 배교를 강요할 때면, “천주교가 없이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욕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감사는 할 수 없이 신 베드로를 다른 신자들과 함께 옥에 가두어 두도록 하였고, 그는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해야만 하였다. 그동안 그는 때때로 마음이 약해진 적도 있었지만, 언제나 용맹한 신앙심으로 이를 극복하였다. 그러다가 1839년의 기해박해가 일어난 뒤에, 임금의 명에 따라 전주 장터(숲정이)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 가량이었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출처: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2017. 10. 20. 제3판 1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