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위 복자 약전

No.96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96.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1789-1839)

 

김조이(金召史)* 아나스타시아는 충청도 덕산의 서민 가정에서 태어나, 장성한 뒤 이성삼 바오로와 혼인하였다. 그리고 남편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본디 김 아나스타시아는  원만한 성격을 갖고 있었는데, 천주교에 입교한 뒤로는 이러한 성격으로 더욱더 모든 이에게 사랑받았다. 또 그녀의 가정은 모두가 열심한 신자로 성가정의 본보기가 되었다. 그녀는 언제나 교리를 실천하는 데 열심이었으며, 자녀들의 교리 교육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마을 부인들의 교육에까지 유의하였으니, 그녀의 권면은 그들에게 아주 유익하였다.

1827년의 정해박해 때에, 김 아나스타시아 부부는 다행히 박해를 피해 다른 곳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그들 부부는 피신한 곳에서 딸 이봉금 아나스타시아를 낳고, 선교사를 집에 모시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이때 그들 부부는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며, 딸 이 아나스타시아는 첫 영성체를 하였다. 그녀의 가정에 다시 박해의 위협이 닥쳐온 것은 1839년의 기해박해 때였다.

박해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김 아나스타시아의 남편은 집에 없었다. 그러나 이미 밀고된 상황이었으므로 피신을 하기는 해야만 하였다. 이에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딸을 데리고 전라도 광주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홍재영 프로타시오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같이 있던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다.

전주에 도착한 김 아나스타시아는 여러 차례 신문을 당하였으나, 어떠한 위협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녀는 ‘천주를 배반하고 남편이 있는 곳을 말하라.’는 강요를 줄곧 거절하였으며, 이 때문에 더 혹독한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윽고 그녀는 감사 앞으로 끌려나가 다시 형벌을 받은 뒤 옥에 갇혔고, 그녀의 어린 딸도 굳게 신앙을 증언한 뒤 옥으로 끌려왔다.

어느 날 김 아나스타시아는, 딸 이 아나스타시아가 문초를 받고 옥으로 돌아오자, 짐짓 딸의 신앙을 의심하는 체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너는 고문을 당하면 꿋꿋하게 견디어 낼 힘이 없어 틀림없이 배교를 하게 될 거다.” 그러자 딸은 펄쩍 뛰면서 아니라고 부정하였다. 그리고 어떠한 시련을 당해도 신앙의 가르침에 충실하겠다고 다짐하였다.

마침내 김 아나스타시아는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였다. 그리고 다시 곤장을 맞고 판결이 내려올 때까지 옥중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바라던 참수형을 당하지는 못하였으니, 옥중 생활에서 얻은 병과 형벌의 상처 옥중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이때가 1839년 10월경으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50세였다.

전라 감사가 조정에 올린 김조이 아나스타시아의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김조이는 그 남편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익혔고, 서양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마음을 고칠 줄을 모르니, 참수를 하여도 오히려 죄가 남을 것입니다.”

 

*' 조이' : 과부 또는 나이 많은 여성을 점잖게 가리키는 이두로, 한자로는 '召史'라고 쓰지만, 읽을 때는 '조이'라고 읽는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출처: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2017. 10. 20. 제3판 1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