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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보은, 충주
이기연(李箕延)은 충주에 거주해 오던 연안(延安) 이씨 집안 출신으로, 관직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어려서부터 학문을 닦아오고 있었다. 그가 천주 신앙을 접하게 된 것은 1784년 겨울에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였으며, 그에게 교리를 가르쳐 준 사람은 교회 창설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였다. 그에 앞서 이기연의 딸과 권일신의 조카가 혼인하면서 이기연과 권일신은 사돈 간이 되었다.
그 후 이기연은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러나 그의 세례명은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천주교에 입교하자마자 이기연은 교리를 실천하는 데 노력하였고, 아전인 이부춘(李富春)과 그의 아들 이석중(李石中)을 비롯하여 가족과 이웃에게 널리 교리를 전하였다. 이처럼 그는 ‘충주의 사도’가 되어 이 지역에 천주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러던 중 1790년에 북경의 구베아(A. Gouvea, 湯士選) 주교에게서 조상 제사 금지령이 전달되자 그 명에 따라 제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듬해의 신해박해 때에는 충주 관아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하기 시작하자,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관아에 출두하여 이를 소각하고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다짐한 뒤 석방되었다.
이기연은 집으로 돌아온 뒤 자신의 배교를 뉘우치고 다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알려져 관가에 체포되었고, 다시 배교한 뒤 북쪽에 있는 한 도(道)로 유배되었다.
이기연이 유배지에 있는 동안에도 박해는 계속되었다. 그러면서 그가 천주 교리를 널리 전한 사실이 자세히 알려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는 유배지에서 송환되어 다시 충주 관아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문초와 형벌 가운데서도 굳게 신앙을 증거함으로써 사형 선고를 받았으니, 이때 충청 감사가 조정에 올린 그의 사형 선고문은 다음과 같았다.
“권일신과 연결되고 사학에 깊이 미혹되어 집안의 제사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집안에서부터 가까운 동네에 이르기까지 남녀들을 속이고 꾀어 한 고을을 미혹시켰습니다. 스스로 우두머리가 되었고, 즐겨 사학의 괴수가 되었습니다. 숨겨진 죄악이 이미 드러났으니, 정황이나 종적을 숨기기 어렵습니다. 그가 범한 죄를 생각하면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습니다.”
1802년 1월 20일(음력 1801년 12월 17일) 형조에서는 임금에게서 이기연의 사형 선고문에 대한 재가를 얻어 충주로 보냈다. 그 결과 이기연은 같은 해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 충주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2018. 4.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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