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신자들 사이에서 ‘김군호의 어머니’로 알려져 있던 이 막달레나는 착하고 온화하면서도 한편으로 용감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시골에서 태어나 16세 때 서울에 사는 김 씨와 혼인한 그녀는 이듬해 남편과 함께 친정에 갔다가 천주 교리를 접하게 되었다. 그녀의 친정 식구들은 그녀 부부가 오기 전에 천주 교리를 배워 이를 실천해 오고 있었다.
남편과 함께 교리를 배운 막달레나는 서울 시가로 와서는 시어머니에게도 교리를 가르쳐 천주교에 입교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또 시어머니를 달래 집안에 있던 미신과 관련된 모든 물품들을 폐기해 버렸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이 일로 화를 당할까 염려하여 오히려 더 열심히 미신 행위를 하였고, 그녀의 남편도 천주교를 비난하고 나서면서 막달레나는 자주 괴롭힘을 당해야만 하였다.
그러던 중 시어머니가 사망하자 집안 식구들은 미신 행위에 매달렸고, 막달레나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여기에 동참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시어머니가 사망한 지 두 돌이 되어 대상(大祥, 큰 제사)을 치르는 날이 되자, 집안 식구들은 막달레나에게 시어머니 위패(位牌)에 절할 것을 강요하였고, 그녀는 목숨을 걸고 이를 거부하였다. 그때부터 막달레나에 대한 집안사람들의 박해는 끊이지 않았고, 그녀는 신자와 교류할 수도, 기도문을 배울 수도, 강론을 들을 수도 없게 되었다.
이러한 박해에도 신앙에 대한 막달레나의 열망은 매우 강렬했고, 겨우 틈을 내서 오상경(五傷經)의 앞부분만을 배울 수 있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오상경의 후반부를 배울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했으며, 그러던 어느 날에는 ‘예수 마리아께서 내게 그것을 보여주시면 배우기 쉬울 텐데…….’라고 중얼거리게 되었다. 그러자 갑자기 공중에서 “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지극히 보배로우시며 정결하신 성체의 오상이여!”(吾主耶蘇 極珍至潔 聖體之五傷)라는 소리가 들렸다. 이에 그녀는 그 구절이 자신이 알고자 원하던 오상경의 뒷부분이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땅에 엎드려 이를 외웠고, 그러자 그 다음 구절이 마치 이전에 알고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외워졌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이 막달레나는 남편과 함께 가산을 모두 버리고 시골로 피신하여 바느질과 길쌈으로 생활을 꾸려나갔다. 그러다가 남편이 사망한 뒤로는 좀더 자유롭게 신자의 본분을 지킬 수 있었다.
이후 막달레나는 45세(1816년) 때 중병이 들어 대세(代洗)를 받은 적이 있었고, 50세(1821년)가 되었을 때는 경포(京捕), 곧 서울의 포교에게 체포되었다가 배교하고 풀려난 적도 있었다. 이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나약함과 잘못을 통회하며 생활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서울로 이주한 그녀는 오로지 신앙생활에 전념하면서 기도와 독서에 열중하였고, 많은 비신자들에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거나 죽음에 처한 비신자 아이들에게 대세를 주는 데 노력했으며, 자주 성사를 받았다.
막달레나가 다시 체포된 것은 1839년의 기해박해가 한창이던 5월(음력)이었다. 이내 포도청으로 압송된 그녀는 이전의 잘못을 보속하려는 생각에서 신앙을 굳게 증거하고 순교하기로 다짐하였다. 그런 다음 포도대장 앞으로 끌려가 모두 일곱 차례에 걸쳐 문초를 받으면서 두 번의 주뢰형을 당하고, 태장(笞杖) 230도를 받았지만 결코 굴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그녀는 진심으로 칼날 아래 목숨을 바칠 수 있기를 기원하였다. 그러다가 옥에 갇힌 지 8개월 만인 1840년 1월 10일(음력 1839년 12월 6일) 옥중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으니, 당시 그녀의 나이 69세였다.
(2018. 4.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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