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133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38 권성여 프란치스코
  1. 권성여 프란치스코 (1798∼1841)

 

권(權)성여 프란치스코는 서울의 신자 부모에게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의 집안은 몰락한 역관 집안으로 가난하였고, 게다가 프란치스코가 어렸을 때 부친이 사망한 탓에 그의 모친은 자식들을 데리고 비신자 친척 집에서 살아야만 하였다.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순교한 권득인(權得仁, 베드로) 성인은 그의 동생이다.

프란치스코가 열 살쯤 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읽던 책이라며 작은 교회 서적 1권을 그에게 주었다. 그는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음에도 어린 나이로는 드물게 신중하고 확고한 태도로 열심히 공부에 전념하였다. 그러던 중 우연히 교우들을 만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고, 이때부터 그는 그 자신은 물론 온 가족이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도록 이끌었다.

장성한 뒤 프란치스코는 동생 베드로와 함께 교회 재건을 위해 봉사하였다. 그들은 선교사 영입 운동에 동참했으며, 선교사들이 입국한 뒤에는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와 프랑스 선교사들을 도와 일하였다. 그리고 동생과 함께 서울 배오개(현 서울 종로구 종로4가⋅인의동) 사거리에서 약국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1837년에 프란치스코는 박해가 일어날까 염려하여 강원도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러나 2년 뒤인 1839년의 기해박해로 동생 베드로가 체포되어 순교하였고, 프란치스코도 최영수(崔榮受, 필립보)의 종적을 뒤쫓던 포교들에게 쫓기는 몸이 되었다. 한 밀고자가 ‘필립보의 거처를 프란치스코가 알 것이다.’라고 포교들에게 일러주었던 것이다. 그 결과 프란치스코는 1841년 4월 8일(음력 윤3월 17일) 충청도 충주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권성여 프란치스코는 포교들이 들이닥치자 당황하지 않고 아내에게 모든 일을 부탁한 뒤 편안한 표정으로 집을 나섰다. 그런 다음 청주 관아로 압송되어 신앙을 굳게 증거한 뒤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이내 포장 앞으로 끌려 나간 프란치스코는 ‘필립보의 거처를 밀고하라.’는 강요를 당하면서 모두 여섯 차례의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모든 형벌을 참아냈고, 어느 누구도 고발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하느님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리고 6개월 동안 옥살이의 고통을 겪은 뒤, 1841년 9월 24일(음력 8월 10일) 함께 갇혀 있던 허대복(안드레아)와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했으니, 당시 그의 나이 43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