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래호(朴來浩) 요한 사도는 황해도 신천(信川)의 향족(鄕族)으로, 문장과 글씨로 명성이 자자한 사람이었다. ‘래호’는 그의 자(字)이다. 그는 이 씨와 혼인하여 두 딸을 두었으며, 가난하여 약을 팔거나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생활하였다. 한때 그는 자신의 학식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의 과거 시험을 대신 치른 적도 있었다. 1866년 황해도 풍천(豊川)에서 순교한 이 베드로는 그의 장인이다.
박 요한 사도가 천주 교리를 접한 것은 1860년이었다. 그러자 그는 즉시 천주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했으며, 이후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면서 이웃에 교리를 전하는 데도 노력하여 자신의 아내와 딸과 누이는 물론 장인 이 베드로와 많은 친구들을 입교시켰다. 그리고 1862년에 상경하여 베르뇌(S. Berneux, 張敬一 시메온) 주교에게서 세례를 받았고, 이듬해에는 처음으로 고해성사를 받았다.
세례를 받은 뒤 요한 사도는 신앙생활에 더욱 충실하였고, 480리가 넘는 길을 걸어가서 고해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또 입교하기 전에 남의 재물을 함부로 썼던 행위를 뉘우치고 이를 보속하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팔아 돈을 모두 갚았으며, 더 많은 비신자들에게 교리를 전하고 입교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신천에서 박해가 일어나자 요한 사도는 가족들을 데리고 송화(松禾)로 피신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베르뇌 주교를 영접하여 안봉옥(安鳳玉, 사도 요한) 등 교우들이 그의 집에서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주교가 떠난 후 신자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자, 요한 사도는 가족을 데리고 다시 신천으로 돌아왔으며, 1865년 1~2월에는 그곳을 방문한 베르뇌 주교를 영접하였다. 베르뇌 주교가 그를 신천 회장으로 임명한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요한 사도 회장은 1865년 12월 말에 상경하여 베르뇌 주교에게 성사를 받고 신천으로 돌아왔다.
1866년 2월(음력) 무렵 병인박해가 발발했다는 소식을 들은 요한 사도 회장은 가족들을 데리고 서흥(瑞興)으로 피신했다가 6월에는 다시 서울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교우 집과 공덕리(孔德里, 현 서울 마포구 공덕동) 등지를 전전하며 짚신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였고, 박해 중임에도 이의송(李義松, 프란치스코) 등 신자들과 교류하며 박해 상황을 알려주었다. 그러던 중 병인양요(丙寅洋擾)로 인해 박해가 가열되면서 한 밀고자의 고발로 요한 사도 회장에게도 체포령이 내려졌으며, 그는 9월 6~7일(음력) 사이에 신발을 팔러 갔다가 포교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내 포도청으로 압송된 요한 사도 회장은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한결같이 배교를 거부하고 신앙을 굳게 증거하였다. 그 결과 그는 사형 판결을 받고 1866년 10월 22일(음력 9월 14일)에 양화진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 54세였다.
(2018. 4.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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