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133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44 김이쁜 마리아
  1. 김이쁜 마리아 (1812∼1866)

 

김이쁜(金於哛) 마리아는 마음이 순량한 과부로 황해도 서흥(瑞興)에서 살다가 1866년에 순교한 이의송(李義松) 프란치스코와 재혼한 뒤로는 배천[白川]에서 살았다. 재혼한 뒤에는 남편과 자식들을 사랑하면서 가정을 화목하게 꾸려나가는 데에 노력하였다. 1866년의 순교자 이붕익(李鵬翼) 베드로는 프란치스코의 아들이며 그녀의 의붓 아들이다.

1857년경에 마리아의 가족들은 황해도 배천에서 서울 차동(車洞)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2년 뒤 남편 프란치스코가 서소문 밖에 사는 정의배(丁義培, 마르코) 회장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자, 그녀도 아들 베드로와 함께 남편의 권유를 받아들여 교리를 배운 뒤 베르뇌(S. Berneux, 張敬一 시메온) 주교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이때부터 마리아는 집안에 있는 교회 서적과 묵주, 십자고상 등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생활을 하면서 교리를 실천하였다.

1866년의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김이쁜 마리아는 남편을 따라 황해도 신천(信川)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상경하여 비신자인 시숙 집에 거처하였다. 그리고 다시 남편과 아들 베드로와 함께 시흥 봉천(현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에 사는 베드로의 처남 이영택(李永宅)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포교들이 그녀의 시숙을 닦달하여 그녀의 가족이 있는 곳을 알아냈고, 결국 그녀는 남편과 아들과 함께 봉천에서 체포되어 우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마리아는 포도청에서의 문초와 형벌 중에도 남편 프란치스코의 권면에 힘입어 “어찌 지금에 와서 천주를 배척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진술하면서 굳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런 다음 1866년 10월 23일(음력 9월 15일) 남편과 아들 베드로와 함께 양화진 형장으로 압송되어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녀의 나이 54세였다.

 


출처: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2018.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