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송(李義松) 프란치스코의 본관은 전주이고, 자(字)는 ‘여장’(汝長)으로, 황해도 신천(信川)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래 성품이 온화하고 마음이 착했으며,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으나, 후에 상처하고 서흥(瑞興)에 살던 과부 김이쁜(金於哛) 마리아와 재혼하였다. 아내 마리아와 차남 이붕익(李鵬翼, 베드로)도 1866년에 그와 함께 순교하였다.
고향에서 의원으로 생활하던 프란치스코는 훗날 배천[白川]으로 이주해 살다가 1857년경에 아내 마리아와 차남 베드로, 딸 이 바르바라를 데리고 서울 차동(車洞, 일명 수렛골, 현 서울 중구 순화동⋅의주로)으로 다시 이주해 살았다. 이곳에 산 지 2년 뒤인 1859년경에 프란치스코는 서소문 밖에 사는 정의배(丁義培, 마르코) 회장을 만나 천주 교리를 배웠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아내와 자식들에게도 교리를 가르쳤다. 그런 다음 1862년에는 함께 베르뇌(S. Berneux, 張敬一 시메온) 주교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이후 프란치스코는 교회 서적과 묵주, 십자고상 등을 구입해 지니고 다니면서 가족들과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또 자신의 집에 공소를 차려 신자들이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했으며, 자신의 의술을 이용하여 병든 사람들을 많이 고쳐주었고, 비신자들을 권면하여 입교시키는 데도 노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덕보(李德甫, 마태오)와 함께 황해도 지역을 순회하며 12개 이상의 고을에 복음을 전하기도 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발생하자 이의송 프란치스코는 가족을 데리고 신천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상경하여 비신자인 형 집에 거처하였다. 그러다가 아내 마리아와 아들 베드로와 함께 시흥 봉천(현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에 사는 베드로의 처남 이영택(李永宅)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포교들이 그의 형을 닦달하여 프란치스코의 거처를 알아냈고, 결국 그는 아내와 아들과 함께 봉천에서 체포되어 우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프란치스코는 포도청에서의 문초와 형벌 중에도 굳게 신앙을 증거하면서 아내와 아들에게도 “정신을 수습하여 실수하지 말라.”며 여러 차례 권면하였다. 그런 다음 1866년 10월 23일(음력 9월 15일) 그들과 함께 양화진 형장으로 압송되어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 45세였다. 포도청에서의 문초 때 그가 마지막으로 한 진술은 다음과 같았다.
“여러 해 동안 천주교를 믿고 교리를 실천해 왔으니, 어찌 지금에 와서 이를 배교할 수 있겠습니까?”
(2018. 4.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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