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은’(重殷)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김한여(漢汝) 베드로는 서울 출신으로, 낙산(駱山) 근처의 양사동(養士洞, 현 서울 종로구 종로 6가)에서 살았다. 그는 17세 때 부친에게 교리를 배웠으며, 서대문 밖에 살던 조(趙) 씨에게 세례를 받고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의 직업은 능라장(綾羅匠) 편수였고, 일을 위해 그는 궁궐을 드나들며 생활하였다.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체포되었던 베드로는 배교하고 석방되었으며, 이후에는 궁궐의 나인을 첩으로 맞이하여 살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오랫동안 신앙과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첩이 죽고, 점차 ‘천주를 배반하면 반드시 뒤에 재앙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1863년 4월(음력) 무렵부터 다시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1865년 봄, 베드로는 부친의 권유에 따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고, 베르뇌(S. Berneux, 張敬一 시메온) 주교를 찾아가 고해성사를 받았다. 그때부터 베드로는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는 비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켰으며, 자신의 집을 공소로 만들어 교우들이 베르뇌 주교에게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1866년 9월에 체포된 김한여 베드로는 좌포도청으로 압송되어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교우들을 밀고하지 않았으며, “매질 아래 죽는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배교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신앙을 굳게 증거하였다.
사형 판결을 받고 형장으로 압송되는 도중에 베드로는 목이 말라 포교에게 술 한 잔을 청하였다. 이때 포교가 그에게 말하기를 “죽으면 다시는 술을 마시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자, 기쁜 얼굴로 “천당에 가서 천일주를 먹을 것이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런 다음 양화진 형장에서 1866년 10월 25일(음력 9월 17일)에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했으니, 당시 그의 나이 58세였다.
(2018. 4.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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