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운(朴聖云) 바오로는 서울 남문 밖 전생서(典牲署, 현 서울 용산구 후암동) 앞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에서는 일찍부터 천주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바오로도 어렸을 때부터 집안의 신앙을 이어받았다. 1868년 서울에서 순교한 박 바오로는 그의 조부이고, 우포도청에서 순교한 박순지(朴順之, 요한 사도)는 그의 백부였다. 이 밖에도 그의 집안에서는 여러 명의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박성운 바오로는 본래 성품이 순직(順直)하였으며, 부모의 말씀에 늘 순종하였다. 16세 때 한 요한 사도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짐꾼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 나갔다. 그러다가 1866년의 병인박해 초기에 베르뇌(S. Berneux, 張敬一 시메온) 주교가 순교하자, 동료들과 함께 주교의 시신을 찾아내 와서(瓦署, 현 서울 용산구 한강로3가)에 안장하였다.
바오로가 체포된 것은 1866년 10월이었다. 포교들이 들이닥치자 마을 사람들이 그에게 ‘배교하라’고 종용했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였다. 그런 다음 좌포도청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자, 가족들과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밀고를 거부했으며, 세례를 받은 사실과 서양 선교사를 만난 사실도 끝까지 숨겼다. 그러고 나서 “이미 천주를 섬겨 왔으니, 이 마당에 이르러 빨리 죽기만을 바랄 뿐이오.”라고 하면서 순교 원의를 드러냈다.
그 결과 박성운 바오로는 사형 판결을 받고 1866년 11월 20일(음력 10월 14일)에 양화진으로 압송되어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 23세였다. 형장으로 가던 도중에 바오로는 “어려서부터 부모의 가르침에 따라 천주 교리를 실천해 왔는데, 이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할 일이기 때문에 천주님을 위해 죽으러 가는 것이다.”라고 마지막으로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리고는 결박이 잠시 풀린 사이에 성호를 긋고 칼을 받았다.
(2018. 4.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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