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133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55 박아기 막달레나
  1. 박아기 막달레나 (1809∼1866)

 

박아기[朴阿只] 막달레나는 서울 남문 밖 전생서(典牲署, 현 서울 용산구 후암동) 앞에서 태어났으며, 10세 이전에 이미 모친에게 천주 교리를 배워 신앙생활을 하였다. 1868년 서울에서 순교한 두 명의 박 바오로는 그녀의 오라버니들이었고, 우포도청에서 순교한 박순지(朴順之, 요한 사도)는 그녀의 조카였으며, 1866년에 양화진에서 순교한 박성운(朴聖云) 바오로는 그녀의 손자뻘이었다. 또 그녀와 함께 순교한 안순명(安順明) 베드로는 그녀의 남편이었다.

막달레나는 본래 성품이 겸손하며, 어질고 자애로웠다. 20세 가량 되었을 때, 공덕리(孔德里, 현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 사는 안 베드로와 혼인하였고, 이후에도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반면에 그녀의 남편은 이러한 아내를 구박하는 등 신앙을 멀리하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항상 남편에게 순명하면서 남편을 권면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결과 남편 베드로도 점차 생각을 바꾸어 천주교에 입교하기에 이르렀다.

그녀는 자신의 좋은 옷과 음식을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죽을 위험에 처한 비신자 아이들에게 대세(代洗)를 주는 데 열심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남의 몸에 난 종기를 보면 기쁜 마음으로 고름을 빨아주곤 했으므로 ‘빨주부 마누라’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1866년의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박아기 막달레나는 교우들에게 ‘겁내지 말라’며 용기를 주었고, 체포된 주교⋅신부들과 신자들의 순교를 위해 기도하였다. 그러던 중 11월 17일(음력 10월 11일)에 포교들이 집으로 들이닥쳐 남편 베드로를 체포하였다. 이때 이 소식을 들은 막달레나는 이웃 비신자의 집으로 가서 한동안 묵상한 뒤 자기 집으로 가서 “나는 태중 교우이니, 남편은 놓아주고 대신 나를 잡아가시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포교들은 이 말을 듣지 않고, 그들 부부를 함께 포도청으로 압송하였다. 길을 가던 도중에 날이 저물어 하룻밤을 묵게 되었을 때, 포교들이 막달레나에게 ‘교우들을 밀고하라’고 다그치자, 그녀는 “천주교에서는 남을 밀고하지 못하도록 가르치고 있으니, 죽을지언정 남의 이름을 댈 수 없소.”라고 대답하였다.

이튿날 좌포도청으로 압송된 막달레나는 문초와 형벌 가운데서도 교리의 가르침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굳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진술에서 남편 베드로가 “부부가 함께 승천하면 좋겠소.”라고 하자, 막달레나도 “부부가 함께 체포되었으니, 함께 생사를 같이 하겠소.”라고 진술하였다. 그런 다음 막달레나는 1866년 11월 24일(음력 10월 18일) 또는 25일에 포도청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녀의 나이 57세였다.

 

 


출처: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2018.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