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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천안
고의진 요셉의 어릴 때 사정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고씨 집안에서는 요셉의 부친 고시수 야고보가 홍주 원머리(현 충남 당진시 신평면 한정리)에 살 때 처음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이후 가족들을 데리고 목천 소학골(현 충남 천안시 북면 납안리)로 이주해 살았던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소학골로 이주한 뒤 요셉은 이웃에 살던 배문호 베드로와 친하게 지내면서 열심히 교리를 실천했으며, ‘박해를 받으면 함께 순교하자’고 다짐하였다. 그들은 1866년의 병인박해 이전까지 페롱(S. Féron, 權 스타니슬라오) 신부와 칼래(N.A. Calais, 姜 니콜라오) 신부 등에게 성사를 받는 은총을 누리기도 하였다.
1866년의 병인박해가 소학골 교우촌을 휩쓴 것은 칼래 신부가 이곳을 떠난 직후인 1866년 11월 14일(음력 10월 8일)이었다. 목천 포교들이 들이닥쳐 요셉과 배문호 베드로를 비롯하여 이웃에 사는 최천여 베드로와 라자로 형제를 체포하여 목천으로 압송한 것이다.
목천 관아에 이르러 문초와 형벌이 시작되자 요셉은 천주교 신자임을 분명하게 고백하였고, 관장이 “배교하라.”고 하자 “죽을지라도 배교는 할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그는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았으며, 옥에 갇혀 있을 때는 배문호 베드로와 함께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를 바치곤 하였다.
그런 다음 고의진 요셉은 동료들과 함께 공주로 이송되었다. 도중에 일행은 서로 순교를 권면하면서 기도문을 소리 높여 화답하면서 외웠는데, 이 모습을 본 배교자 두 사람이 스스로 통회하고 포교들에게 자수한 뒤 함께 공주 진영으로 갔다고 한다.
공주에 이르러 요셉은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조금도 여기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증거하였다. 또 하옥될 때는 배문호 베드로와 서로 위로하면서 순교 원의를 다지곤 하였다. 그런 다음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때는 1866년 12월 14일(음력 11월 8일)로, 요셉의 나이는 대략 19세였다.
고의집 요셉과 동료들이 순교한 뒤 그 시신은 강치운이 찾아다 소학골 인근에 안장하였다고 한다.
(2018. 4.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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