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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천안
배문호 베드로의 본관은 성주(星州)요, 보명(譜名: 족보에 기록된 이름)은 ‘시경’(時慶)이다. 1800년의 청주 순교 복자 배관겸 프란치스코는 그의 4대조이고, 1868년의 서울 순교자 배화첨 베드로 회장은 그의 조부가 된다. 그의 집안은 본래 충청도 면천 양제(현 충남 당진시 순성면 양유리)에서 살았으나, 프란치스코가 순교한 뒤 목천 소학골(현 충남 천안시 북면 납안리)로 이주해 신앙생활을 하였다.
태중 교우로 태어난 베드로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의 신앙을 이어받아 열심한 신자가 되었다. 특히 그는 이웃에 살던 고의진 요셉[iii]과 친하게 지내면서 열심히 교리를 실천했으며, ‘박해를 받으면 함께 순교하자’고 다짐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칼래(N.A. Calais, 姜 니콜라오) 신부에게 성사를 받고 교리를 배운 뒤 아내와 동정을 지키면서 고신극기에 노력하였다.
1866년의 병인박해가 소학골 교우촌을 휩쓴 것은 칼래 신부가 이곳을 떠난 직후인 1866년 11월 14일(음력 10월 8일)이었다. 목천 포교들이 들이닥쳐 배문호 베드로와 고 요셉을 비롯하여 이웃에 사는 최천여 베드로와 라자로 형제를 체포한 것이다. 이때 배문호 베드로는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목천 관아에 이르러 문초와 형벌이 시작되자 베드로는 요셉과 함께 천주교 신자임을 분명하게 고백하였다. 또 관장이 “배교하고 천주교 신자들을 밀고하라.”고 하자 “죽을지라도 배교는 할 수 없으며, 신자들도 밀고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면서 십계를 풀어 설명하였다. 그들은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았으며, 옥에 갇혀 있을 때는 둘이 함께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를 바치곤 하였다.
그런 다음 배문호 베드로는 동료들과 함께 공주로 이송되었다. 도중에 일행은 서로 순교를 권면하면서 기도문을 소리 높여 화답하면서 외웠는데, 이 모습을 본 배교자 두 사람이 스스로 통회하고 포교들에게 자수한 뒤 함께 공주 진영으로 갔다고 한다. 한편 베드로는 모친에게 편지를 보내 “저는 어려움을 잘 참고 있으니, 저를 생각하시면서 아무쪼록 열심히 수계하시다가 제 뒤를 따라 오십시오.”라고 당부하기도 하였다.
공주에 이르러 베드로는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조금도 여기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증거하였다. 또 하옥될 때는 요셉과 서로 위로하면서 순교 원의를 다지곤 하였다. 그런 다음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때는 1866년 12월 14일(음력 11월 8일)로, 베드로의 나이는 23세였다.
배문호 베드로와 동료들이 순교한 뒤 그 시신은 강치운이 찾아다 소학골 인근에 안장하였다고 한다.
(2018. 4.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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