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133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22 이육희
  1. 이육희 (?∼1802)

 

이육희(李六喜)는 1801년의 순교자 유관검(柳觀儉)의 아내로, 전라도 전주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서 살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녀의 세례명은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1801년의 순교자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은 그녀의 시아주버니이고, 신희(申喜)는 그녀의 동서였다.

이육희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설립된 직후 시아주버니인 아우구스티노가 천주교에 입교한 뒤 가족에게 교리를 가르치면서 남편 유관검과 함께 천주 신앙을 받아들여 실천하게 되었다. 이후 그녀는 남편의 교회 활동을 열심히 뒷바라지하였고, 1795년에는 초남이를 방문한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에게 성사도 받았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초남이에서는 유항검 아우구스티노가 가장 먼저 체포되어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었고, 이어 이육희의 남편 유관검과 동료들도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10월 22일(음력 9월 15일)에는 이육희와 동서 신희, 그리고 남은 가족들이 모두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육희는 전주 감영에서의 문초와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신앙을 지킨 뒤 옥살이를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조정에서 이육희와 동서 신희, 신희의 맏며느리 이순이(李順伊, 루갈다)를 함경도 각처의 관비(官婢)로, 나머지 가족들은 섬과 벽지의 노비로 보내라는 명을 내렸고, 이에 따라 이육희는 가족들과 함께 11월 18일(음력 10월 13일)에 유배지로 출발하였다.

이에 앞서 이육희와 가족들은 관리에게 “우리들은 천주를 공경합니다. 그러니 나라의 법률에 따라 처형해 주십시오. 우리 모두는 천주를 위하여 죽기를 원합니다.”라고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육희와 가족들이 유배지로 향하던 도중에 관아에서는 아이들을 제외한 어른들을 다시 전주로 회송하도록 하였고, 이에 따라 그들은 다시 전주로 끌려와 투옥되었다.

이후 전주 감영에서는 이육희와 가족들에게 다시 문초와 형벌을 가한 뒤 사형 선고문을 작성하여 조정에 보고하였고, 이를 받은 조정에서는 전주 감영에 사형을 집행하도록 명하였다. 그 결과 이육희는 1802년 1월 31일(음력 1801년 12월 28일) 가족과 함께 숲정이 형장(현 전북 전주시 덕진구 진북동)으로 끌려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는데, 당시 전주 감영에서 조정에 올린 이육희의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의 내용이 들어 있었다.

“ ‘나라의 금지령이 비록 엄하다고는 하지만, 천주교는 본래 중요한 것입니다. 배교하여 삶을 도둑질함은 절의(節義)에 죽는 것보다 못합니다. 지금에 와서 어찌 여러 말을 하겠습니까? 오직 빨리 죽기를 바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출처: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2018.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