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133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58 최종여 라자로

관련 장소

공주, 천안
  1. 최종여 라자로 (1825∼1866)

 

최종여 라자로의 본관은 강릉(江陵)으로, 보명(譜名: 족보에 기록된 이름)은 ‘가석’(嘉錫)이다. 그의 부모는 경상도 출신으로 일찍이 천주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이후 이곳 저곳으로 피신해 다니다가 충청도 목천 소학골 교우촌(현 충남 천안시 북면 납안리)에 정착하여 신앙생활을 하였고, 그 결과 라자로도 이곳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1866년 충청도 공주에서 순교한 최천여 베드로는 그의 형이고, 1868년 경기도 죽산에서 순교한 최제근(崔濟根) 안드레아는 그의 아들이다. 또 1910년에 사제품을 받은 최문식(崔文植, 베드로) 신부는 라자로의 후손이다.

라자로는 본성이 순량한 데다가 부모의 교훈을 잘 받아 열심히 교리를 실천했으며, 소학골 교우촌에서는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자식들을 열심히 가르쳤다. 또 1866년의 병인박해 이전까지 페롱(S. Féron, 權 스타니슬라오) 신부와 칼래(N.A. Calais, 姜 니콜라오) 신부 등에게 성사를 받는 은총을 누리기도 하였다.

병인박해가 소학골 교우촌을 휩쓴 것은 칼래 신부가 이곳을 떠난 직후인 1866년 11월 14일(음력 10월 8일)이었다.[iv] 목천 포교들이 들이닥쳐 라자로 형제를 비롯하여 이웃에 사는 배문호 베드로, 고의진 요셉 등을 체포한 것이다. 이때 라자로는 병에 걸려 걷기조차 힘들었는데, 포졸들은 그의 목을 매어 동료들과 함께 목천으로 압송하였다.

목천 관아에 이르자 관장은 라자로에게 “너는 천주교를 신봉하느냐”고 물었고, 라자로는 “그렇다.”고 분명히 대답하였다. 그런 다음 얼마 안 되어 동료들과 함께 공주 진영으로 이송되어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때는 1866년 12월 14일(음력 11월 8일)이요, 라자로의 나이는 41세였다.

최종여 라자로와 동료들이 순교한 뒤 그 시신은 강치운이 찾아다 소학골 인근에 안장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