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장정온 아네타 수녀(1906-1950?)
장정온(張貞溫) 아네타(Agnetta, 악니다) 수녀는 1906년 9월 26일 경기도 인천부 부내면 전동(현 인천광역시 중구 전동)에서 인동 장씨 기빈(箕彬) 레오와 황 루치아의 딸로 태어나 유아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마리아였다. 대한민국 제2공화국 총리를 지낸 장면 요한은 장정온 아네타 수녀의 오빠이고, 전 춘천교구장 장익 십자가의 요한 주교는 장정온 아네타 수녀의 조카이다.
장정온 아네타 수녀는 어려서부터 나무랄 데 없는 언행과 정직하고 강한 인내심을 보여 주었다. 그녀는 부모님을 따라 인천 화촌동(현 인천시 화평동)으로 이주하였다가 1915년 서울 정동으로 이주하였고, 1922년 3월 숙명 여자 고등 보통학교(현 숙명 여자 고등학교의 전신)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그해 5월 23일 미국으로 건너가 메리놀 수녀회에 입회한 뒤 같은 해 8월에 ‘아네타’라는 수도명으로 착복식을 가졌다. 장정온 아네타 수녀는 수녀회에 입회할 때, “왜 수도 생활을 하려 하는가? 장래에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받았는데, 이에 대해 “거룩한 사람이 되고, 내 나라와 민족을 돕고 싶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1925년 4월 30일에 첫 서원을 한 장정온 아네타 수녀는 그해 10월 첫 소임지로 한국 평양지목구에 파견되었다. 첫 소임지는 의주 본당이었다. 이곳에서 어린이와 예비 신자들에게는 교리를, 메리놀회 수녀들에게는 한국어를 가르쳤고, 때로는 통역도 담당하였다. 그러다가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1935년 9월부터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지원자들의 지도를 맡았고, 1938년 6월에는 초대 수련장에 임명되었다. 당시 장정온 아네타 수녀는 실천과 모범으로 회원 양성에 힘썼으며,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마음을 드높여’(Sursum Corda) 하느님께 향하라.”는 가르침을 표어로 삼았다.
1941년 12월 7일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뒤, 일제 조선 총독부는 메리놀회 회원들을 모두 연금하였다가 이듬해 6월 미국으로 추방하였다. 이에 앞서 평양대목구장 오세아(William F. O’Shea, 吳 굴리엘모) 주교는 1941년 12월 13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원장으로 임명된 장정온 아네타 수녀를 한국에 남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장정온 아네타 수녀는 수녀 양성에 헌신하면서 수녀들을 위한 기도문과 영적 도서를 번역하였고, 영신 생활과 전교 활동을 위하여 회지 ‘Sursum Corda’(마음을 드높이)를 발간하였다. 수녀들에게 끊임없이 기도하도록 권유하였으며, 각자의 사도직에 파견된 뒤에도 마음은 모원으로 향하도록 가르쳤다.
1945년 해방 이후 장정온 아네타 수녀는 남한에 진출한 메리놀회 선교사들을 통하여 미국의 모원과 연락을 취할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북한 공산 정권의 종교 탄압으로 점점 어렵게 되었다. 그러던 가운데 1949년 5월에는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를 비롯하여 평양대목구 신부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북한 공산 정권이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가 본원으로 쓰고 있던 서포(현 평양시 형제산구역 서포1동)의 건물을 양도하라고 강요하면서 더 이상 공동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장정온 아네타 수녀는 1950년 5월 14일 수도회의 임시 해산을 결정하였다. 아울러 그때까지 본당 신부가 체포되지 않은 본당 분원의 수녀들은 각 분원으로 가고, 본당 신부가 체포된 분원 수녀들은 자신들의 본가로 귀가하도록 하였다.
장정온 아네타 수녀가 미국 모원의 총장 수녀로부터 ‘모원으로 귀원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편지를 받은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이에 장 아네타 수녀는 진남포 성당으로 갔으나 남하를 도와줄 안내자를 만나지 못하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나서 6월 25일 한국 전쟁의 발발로 상황이 급변하자, 강성효 베드로 수녀와 변대옥 헬레나 수녀와 함께 서포에서 멀지 않은 용궁리 회장 집에 머물다가 재경리면의 송림리 공소(현 대동군 판교리) 회장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당시 장 아네타 수녀는 디스크 수술을 받은 직후여서 걸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장정온 아네타 수녀가 북한 인민군 장교와 보위부원들에게 체포된 것은 10월 4일 오후 7시 무렵이었다. 이때 장 아네타 수녀는 자신을 막아서는 베드로 수녀에게 “가야지, 주님의 뜻이라면.” 하고 말하면서 묵주를 들고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한 뒤, 소달구지에 실려 끌려갔다고 한다. 당시 장정온 아네타 수녀의 나이는 44세였다. 장 아네타 수녀는, 오라버니인 장면 요한이 유엔에서 북한의 종교 박해를 비난하는 연설을 한 상황이었으므로 그 뒤 언젠가 처형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