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종’ 124위 순교자들의 순교지를 살펴보면 당시 전국에서 박해의 칼바람이 얼마나 세차게 불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교구별로 분리하면 현재의 광주대교구와 의정부교구, 인천교구, 제주교구 지역을 제외하고 대부분 지역에 124위 순교자들의 순교 흔적이 분포되어 있다. 하지만 많은 순교자들이 하느님을 증거하며 피를 흘렸음에도 현재까지 남아있는 묘소는 18개뿐이다.
가톨릭신문은 103위 성인의 아버지·어머니 편에 이어 순교지별(교구별)로 분류한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온 나라의 매서운 칼바람 앞에서 스러져 갔을 신앙선조들을 기억하며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본다.
서울대교구 관할 내의 새남터, 서소문, 포도청, 당고개, 경기감영 등에서 순교한 순교자들은 124위 중 38명으로 전국 교구 가운데서 가장 많다. 특히 이 지역에서 태어난 순교자들은 20명이지만 18명이 더 이곳에서 순교했음을 볼 때, 타 지역 신자들도 이곳으로 끌려와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보인다.
■ 새남터에서 순교한 주문모 신부
새남터에서 순교한 대표적 인물은 ▲주문모 신부다. 그는 124위 중 유일한 외국인이자 ‘사제’라는 이유로 군문효수를 당했다.
1752년 중국에서 태어난 주문모 신부는 북경교구 신학교에 입학, 제1회 졸업생으로 사제품을 받았다.
북경 구베아 주교는 신앙심이 깊은 주문모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했고, 그는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려 조선에 입국했다.
한양에 도착한 주문모 신부는 계동(현 서울 종로구 계동 지역)에 있는 최인길(마티아)의 집에 머물며 한글을 배웠고, 1795년 부활대축일에는 신자들과 미사도 봉헌한다.
하지만 입국 사실이 탄로나자 강완숙(골롬바)의 집으로 피신했고 그의 입국을 도운 밀사 윤유일(바오로)과 집주인 최인길(마티아), 밀사 지황(사바) 등은 체포돼 순교했다. 그는 비밀리에 열심히 성무를 집행, 활동 6년 만에 조선 교회 신자수는 1만 명에 달했으나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박해자들이 주문모 신부의 행방을 추궁하며 신자들을 체포하고 죽이자 보다 못한 그는 스스로 귀국을 포기하고 박해자들 앞에 선다.
“예수님의 학문은 사악한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나 나라에 해를 끼치는 일은 십계에서 엄금하는 바이므로 절대로 교회 일을 밀고할 수 없습니다.”
‘1811년 북경 주교에게 보낸 조선 신자들의 편지’는 주문모 신부가 ‘새남터’에서 처형당하자 다음과 같은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고 전한다.
“하늘이 본래 청명하였는데, 홀연히 어두운 구름이 가득 차고 갑자기 광풍이 일어 돌이 날리고 소나기가 쏟아져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형 집행이 끝나자 바람과 비가 즉시 그치고, 하늘의 해가 다시 빛났으며, 영롱한 무지개와 상서로운 구름이 멀리 하늘 끝에서 떠서 서북쪽으로 흩어져 버렸다.”
■ 포도청의 순교자들
포도청에서 모진 고문을 견디다 못해 숨진 순교자들도 있다.
이 중 3명의 순교자들이 주문모 신부와 직접 연결된 이들로서 ▲그의 입국을 도운 윤유일 ▲지황 ▲피신처를 제공한 최인길이 대표적이다.
▲윤유일 순교자는 1790년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신자들의 서한을 전한 ‘밀사’로서 유명하다. 그는 이후 ‘성직자 영입’이라는 지도층 신자들의 계획을 알리기 위해 ▲지황 등과 함께 다시 북경으로 갔으며 1794년,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게 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들은 입국 사실이 알려져 주문모 신부를 자신의 집에 숨겨주다 들키자 그를 피신시키고 ▲스스로 신부로 위장한 최인길과 바로 체포된다.
최인길은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중국어를 할 줄 알았으므로 이러한 계책을 쓸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끝끝내 신부의 행적을 발설하지 않았으며 굳은 신앙을 고백했다. 박해자들은 더 이상 그들을 어찌할 수 없다고 판단해 그들을 사정없이 때려 숨지게 한 뒤 시신을 강물에 던졌다. 이때가 1795년 6월의 일이다.
이밖에도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다 순교한 순교자들로는 1801년 신유박해 때 ▲18세의 꽃다운 나이로 숨진 심아기 ▲주문모 신부를 숨겨주고 신자들의 집회 장소를 마련해준 죄목으로 체포된 김이우 등이 있다.
[가톨릭 신문 2009년 6월 28일] 오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