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복의 의미와 순교 영성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위원장
안명옥 주교
1. 시작하면서
그 동안 우리 모두가 염원하던 교황 성하의 방한이 확정되었습니다. 교황 성하의 방한을 준비하는 위원회도 구성되어 본격적인 활동도 시작되었습니다. 그 가운데준비위원회의 영성신심분과 위원회는 순교 영성과 한반도의 평화, 민족화해 등을 위한 자료집을 발간하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영성신심분과 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시복시성의 역사와 현황 그리고 순교 영성에 대한 자료를 간략하게 정리해봅니다.
2. 시복시성의 역사와 현황
1784년 이 땅에 천주교회가 전래된 이 후 거의 100년 이상 한국 교회는 모진 박해에 시달렸고 엄청난 고초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박해를 통해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 한 수많은 순교자들이 배출되었으며, 그 순교자들 가운데 103위의 순교자들이 이미 1984년 시성되었습니다. 현재 윤지충과 동료 123위의 시복을 위한 절차도 완결되어 지난 2월 7일 교황 성하의 재가를 얻었습니다. 이번에 방한하시는 교황께서는 시복을 위한 미사도 집전할 것입니다.
교황께서 재가하신 윤지충과 그 동료 123위 시복 결정은 대략 세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째, 한국 천주교회는 1984년 시성식을 통해 103위의 성인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03위 성인들보다 더 초기에 순교하신 순교자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쉬움으로 남아 있던 차 초기 순교자들의 시복을 추진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이번 124위 시복 결정이 재가 됨으로써 그 동안의 염원이 현실로 이루어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아울러 124위의 시복 결정은 그 추진의 역사가 길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 예를 들어 시복청원을 한 지 5년이 채 안되어 시복이 결정됨 - 상당이 빠른 시일 안에 결정이 재가 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의 자발적인 역랑과 철저한 준비를 보편교회가 높이 평가한 의미도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끝으로 124위의 시복을 위해 한국 천주교회의 신자들이 순교자의 삶을 본받고 삶으로 실천하면서 순교자의 영성을 현양하고 열심한 기도로 동참한 노력도 높이 평가 받는 의미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난날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시복시성을 위해서는 언제나 ‘기도’가 중심에 있었습니다. ‘시복시성의 역사’는 ‘기도운동’의 역사 그 자체입니다. 순교자들의 후예들인 우리 모두 보다 적극적으로 시복과 시성을 위한‘기도 운동’에 동참할 것을 다짐합니다.
3. 순교의 영성
왜 우리의 순교자들은 목숨까지 바쳐가며 하느님을 주님으로 신앙고백 하였는가? 모진 박해 가운데 인간적인 모멸감과 수치심을 견디어내며 마지막 순간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끝내 자신의 목숨마저 내어 던지는 순교의 삶을 선택하고 결단하도록 만드는 힘이 있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하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순교(殉敎)>는 신앙의 진리를 증거 하기 위해 피를 흘려 목숨을 바친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 사랑 그리고 희망 때문에 자유롭게 선택하고 수락한 자신의 죽음으로 진리를 증거하고 하느님을 증거 합니다. 믿는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목숨을 내어 놓습니다. 우리의 순교자들은 하느님에 대한 굳은 믿음 때문에 모진 박해와 혹독한 형벌을 견디어 내면서 순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순교의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남긴 순교자들의 신앙 고백을 들어보면 이 점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순교자들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고 키워내기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버렸으나 오늘 우리의 기억 속에 여전히 살아 남아있습니다.
4. 순교 영성의 재해석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예전의 순교자들처럼 물리적으로 피를 흘리면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아 하느님을 사랑하고 믿으며 증거 하는 시대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순교의 삶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순교의 삶은 언제나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전과는 다른 눈으로 순교의 영성을 새롭게 해석해 내어야 할 과제가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순교 영성을 재해석할 것인가 하고 물어야 합니다.
결국 순교 영성의 재해석은 보이지 않는 박해를 통해 무명으로 순교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당위를 핵심으로 포함할 것입니다.
가) 사랑하며 살자
순교는 생명과 목숨을 지켜야한다는 집착과 탐욕 그리고 명분을 훌훌 털어 버리고 자유롭게 해방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순교는 나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 던질 수 있다는 것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지 사랑하는 마음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사랑은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에 순교는 또한 사랑의 극치입니다. 사랑은 자기를 앞세우는 한 불가능한 행위입니다. 자신을 절대화시키고, 아집과 고집에 사로잡히는 한 불가능한 행위입니다.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는 언제나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사라질지라도 영원히 남는 것이 또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름다운 사랑을 실천하다 목숨을 바친 우리의 순교자들을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믿습니다. 동시에 믿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사랑하기 위해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사랑을 나누면서 살아가도록 그렇게 지음 받았고.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까닭도 하느님과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 내 존재의 이유이자 직업이어야 합니다.
나) 하느님 중심으로 살자
순교영성은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영성입니다. 순교의 영성은 죽어서 영원히 사는 비결을 가르쳐줍니다. 하지만 믿음과 삶 사이의 괴리감이 너무 큽니다. 믿음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이 참으로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내 스스로 강요 없이 믿음을 자유롭게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관심사는 더 이상 믿음이 아닌 경우가 허다합니다.
믿음은 그냥 한갓 장식물에 지나지 않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중심 가치가 아닌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우선적으로 선택합니다. 언제나 맨 나중에 하느님을 찾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께서는 내 삶의 언저리에서 서성이며 배회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모습대로 우리를 지어내실 정도로 우리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이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그대들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귀염둥이 ,나의 사랑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이라는 이름 하나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자면 인간 중심의 삶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인간의 가치관을 버리고 하느님의 가치관에 기대어 살아야 합니다. 순교의 삶을 가능케 하는 힘은 결국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의 힘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안다면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 의존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외면하면 하느님 없이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 없이 사는 삶을 버리고 하느님과 함께 사는 섦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다운 삶을 살자
하느님을 믿는 우리 모두 순교자들의 정신을 본받고 그 영성에 따라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오늘 날 우리는 예전처럼 목숨과 생명을 바쳐가면서 까지 하느님을 증거하는 시대를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극도로 세속화된 세상 안에서 신앙의 진리를 수호하고 지켜야 한다는 소명과 책임은 막중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취미>가 아니며, <사상>도 아니며 <이념>도 아닙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갈라 2, 20)라는 고백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다운 삶은 하느님의 눈으로 이 세상과 사물 그리고 인간을 바라보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믿는 다는 것은 증명이 아닙니다. 희망입니다. 신뢰입니다. 그리고 사랑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우리의 삶이 영원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며 사는 우리 신앙인들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이 가져다주는 힘과 능력을 믿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답게 살고, 그렇게 살기 때문에 당하는 온갖 불이익을 참고 견디어 내는 것이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순교의 삶일 것입니다.
예전에는 목숨을 내어놓는 것이 순교였으나, 이제는 이 세상에 살아남는 것이 어쩌면 순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할 만치 지금 우리는 참으로 척박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순교는 죽어야 할 이유이고 동시에 살아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알고, 믿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예수님께서는 벗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말씀 하셨음에도 우리는 지금까지 나만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나만을 위한 삶이 이제는 곳곳에서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너를 위한 삶으로 우리의 길을 바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를 위해 사는 길, 너와 함께 동행하며 사는 길 밖에 없지 않습니까? 달리 다른 길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는다 할지라도 결코 아쉬워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그리스도를 얻고, 그 분 안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 회의하고 불안하면서 전전긍긍하는 이들을 위해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백발이 되어도 나는 너희를 지고 간다. 내가 만들었으나 내가 안고 간다. 내가 지고 가고 내가 구해낸다.”(이사 46,4)는 처방을 내리십니다. 더 이상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이 또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