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9년 기해박해 때 죽임을 당한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자전
<기해일기>
1838년 말부터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에 의해 시작되었고, 현석문이 순교 일기를 완성한 뒤에는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가 이를 보완하였다.
1836년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던 앵베르 주교는 1838년 말 박해가 일어나 순교자들이 탄생하게 되자 이들의 사적을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같은 해 12월 31일부터 자신이 체포되기 3일 전인 1839년 8월 17일까지의 순교 사적을 수기 형태로 기록하여 <1839년 조선 서울에서 일어난 박해에 관한 보고>라 명명하였으며, 이 보고서는 9월 6일 모방과 샤스탕 신부에 의해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로 보내졌다.
이 기록을 마치기에 앞서 앵베르 주교는 몇 개월전부터 자신이 체포될 것을 예상하고 정하상 바오로와 현경련 베네딕다에게 순교자들의 사적을 면밀히 조사하여 정리하는 일을 계속하도록 하였으며, 이문우 요한과 최영수 필립보, 현석문 등에게도 같은 임무를 맡겼다.
예상대로 앵베르 주교는 8월 10일 자신을 찾아 다니는 포졸들에게 스스로 체포되는 몸이 되었고, 9월 21일 모방, 샤스탕 등 두 선교사와 함께 순교하였다. 정하상과 현경련, 이문우 등도 1839년에 모두 순교하였다.
이때부터 현석문과 최영수는 주교의 명대로 산간 벽지를 돌아다니며 순교자들의 행적을 조사하여 정리하기 시작하였는데, 1841년 8월 최영수가 순교한 뒤에는 현석문이 전적으로 이 일을 맡게 되었다. 현석문은 이후 이재의 토마스와 최 베드로의 협력을 얻어 전후 3년 동안 교우들로부터 모아들인 자료를 정리하고 기록하여 기해박해 순교자전을 완성하였다. 이것이 <기해일기>의 원본이다.
* 자료 출처: <한국 가톨릭대사전>, 한국교회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