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

황사영 백서 (帛書)

황사영 알렉시오의 <백서> (帛書)

 

1801년의 신유박해 때 평신도 지도자로 활동하다 순교한 황사영 알렉시오(1775~1801)가 작성하여 동료 황심 토마스 등의 이름으로 북경의 구베아(Gouvea) 주교에게 보내려고 했던 비밀 서한.

'백서'란 명주에 쓰여진 서한이라는 뜻의 보통 명사인데, 그 중에서도 황사영의 서한이 가장 유명하므로 이것이 <백서>라는 고유 명사로 불려지게 되었다. 서한이 작성된 곳은 배론 교우촌(충북 제천군 봉양면 구학리)이고, 완성된 날짜는 1801년 9월 22일(양력 10월 29일)이었다.

<백서>는 62 x 38cm 크기의 하얀 세명주에 가는 붓으로 작성되었다. 세명주에 서한을 작성한 이유는 교회의 밀사가 이를 옷 안에 꿰매 북경으로 가져감으로써 감시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는데, 이러한 방법은 초기 교회 이래 흔히 사용되던 방법이었다. 이 서한의 총 행수는 122행이며, 일부를 제외하고는 1행당 110자 내외로 모두 13,311자에 달한다.

<백서>의 내용은 황사영의 추안에 수록되었고, 그 원본은 의금부에 보관되어 왔다. 그러나 훗날 그 사본이 유출되어 이만채의 <벽위편>에 수록되었으며, 1859년에 다블뤼 주교가 이 <벽위편>을 입수하여 그 안에 들어 있는 <백서>의 내용을 채록하였고, 이것이 파리외방전교회로 보내져 훗날 샤를르 달레(Ch. Dallet)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에 인용되었다.

그후 <백서>의 원본은 1894년에 의금부의 옛 문서들을 소각할 때, 우연히 발견되어 당시 제8대 조선교구장으로 재임하던 뮈텔(Mutel) 주교에게 전달되었다. 이후 뮈텔 주교는 그 내용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1925년 홍콩에서 간행하였으며, 이해 7월 5일 조선 순교 복자 79위 시복식이 로마에서 거행되었을 때, 그 기념으로 오동나무 상자에 넣은 <백서>의 원본과 프랑스어 역본을 교황 비오 11세에게 선물하였다.

이후 <백서>는 같은 해 로마에서 열린 세계 포교 박람회에 전시되었다가 교황청 민속 박물관으로 옮겨져 지금까지 그곳에 보관되어 오고 있다. 뮈텔 주교는 그 원본을 교황청으로 보내기 전에 실물 크기의 동판 사본을 제작하고, 이를 인쇄하여 학계에 배포하였다.

<백서>는 서론, 본론, 결론 및 대안 제시 등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1행부터 5행까지는 서론, 본론은 6행부터 90행까지로 전체 분량 중에서 약 70%를 차지한다. 여기에 신유박해의 전말과 각 순교자들의 행적을 주문모 신부의 순교까지 다루고 있으며, 결론 및 대안 제시 부분은 91행부터 122행까지로 끝을 맺는다.

* 절두산박물관에 실물 크기의 <백서> 동판 사본이 전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