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의 순교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일생과 사상이 담긴
<최양업 신부의 서한>
- 1849년 12월 3일 조선에 입국한 다음 해인 1850년 10월 1일 도앙골에서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일부-
<최양업 신부의 서한>은 아직 신학생이었을 때인 1842년 4월 26일부터 선종하기 전 해인 1860연 9월 3일까지 작성한 총 19통의 서한이 있다. 이 가운데 아홉 번째 서한인 '1854년 9월에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만은 유실되어 찾을 수가 없다.
14통의 서한들은 모두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원본이고, 4통의 서한들은 모두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사본만이 남아 있다.
최양업 신부는 서한을 모두 라틴어로 작성하였다. 그의 라틴어 실력은 매우 뛰어났으며, 스승 신부들도 이에 대해 아주 감탄하였다.
최양업 신부가 서한을 작성한 시기는 조선으로 귀국하기 전과 귀국 이후로 크게 구분된다.
귀국 이전의 서한 중에서 1842년 4월 26일에 작성한 첫번째 서한은 마카오의 조선 신학교에서 프랑스 함대에 탑승할 날을 기다리는 동안에 파리로 귀국한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5통은 1844년에서 1849년 사이에 필가자, 심양, 홍콩, 상해 등지에서 작성한 것이다.
1849년 12월 3일에 조선으로 귀국한 뒤에 작성한 13통은, 그 발신지가 도앙골, 절골, 동골, 배론, 소리웃, 불구골(풀무골, 2통), 오두재(2통), 안곡(2통), 죽림 등지였는데, 이들은 최 신부가 공소 순방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던 박해 시대의 교우촌들이었을 것이다.
그 작성 시기가 9월에서 11월 사이로 나타나는 이유도 바로 이때가 휴식을 취하는 기간이었음을 설명해 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 서한을 전해 주던 조선 교회의 밀사가 사신 일행에 끼어 중국을 왕래하던 시기가 주로 12월이었던 점도 감안하였을 것이다.
최양업 신부의 서한들은 그의 생애와 활동 내용, 신심과 업적을 이해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자료가 된다. 또 그의 활동 과정에서 함께 나타나는 조선 입국로 개척의 역사, 박해 시대의 교우촌과 생활상, 신자들의 신심과 복음의 확대 과정, 조선의 정치 현실 등에 대해서도 많은 점을 알려 주고 있다.
* 서울 절두산순교박물관 원본 소장.
* 1997년 천주교 청주교구에서 <최양업 신부의 전기 자료집 제1집 "최양업 신부의 서한'>으로 번역 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