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7월 10일 창간
경성교구 천주교 청년 연합회 월간지
별
창간호
'가톨릭 운동'(Catholic Action)을 배경으로 창간되었으며, 문화 창달, 생활 개선, 종교 도덕의 보급을 통해 경성교구 가톨릭 청년들의 문화, 종교 활동을 활성화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한국 사회에서는 민족 문화 운동과 청년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는데, 천주교회에서도 '가톨릭 청년 운동'의 일환으로 각 본당에 청년회가 조직되어 청년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서울에서는 1922년 6월에 '경성교구 천주교 청년 연합회'가, 1924년 7월에는 대구에서 '남방 천주 공교 청년회' (南方天主公敎靑年會)가 발족되어 가톨릭 청년 운동을 체계적으로 전개하였다. 이와 함께 두 청년 연합회는 가톨릭 청년 운동을 효과적으로 홍보 선전함은 물론, 회원들과 일반 신자들의 교육, 호교, 전교 등을 위해 기관지를 발행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1927년 4월 1일 남방 천주 공교 청년회에서 먼저 <천주교회보> ( 가톨릭 신문의 전신)를 발간하였고, 뒤이어 경성교구 천주교 청년 연합회에서도 그해 7월 10일 <별>을 창간하였는데, 그 이전에 경성교구 천주교 청년 연합회에서는 이미 1924년 9월부터 <연합 청년회보>라는 월보를 등사판으로 발행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천주교회보>의 발간에 자극되어 <연합 청년회보>의 지면과 내용을 늘려 <별>을 창간하게 된 것이다.
제호(題號)를 당시의 경성교구 보좌 주교인 라리보(Larribeau, 元亨根) 주교의 문장(紋章)에 표시된 별에서 취하였던 <별>은, 폐간될 때까지 타블로이드판 4면으로발행되었다.
1931년 4월 12일, <별>보 후원회가 조직되면서, 약현 본당 보좌 윤형중 마태오 신부를 비롯하여 청년 지식인들인 장면 요한, 정지용 프란치스코, 장발 루도비코, 이순석 바오로, 조종국 마르코 등이 각각 편집, 논설, 종교, 문예, 통신, 광고 등을 맡아 제작하였다.
내용은 사설, 논설, 교리, 한국 및 세계 교회사, 종교, 도덕, 교육 및 일반 교양에 관한 기사, 과학 상식, 문예, 청년회, 서울과 지방 및 세계 교회의 소식, 독자 투고 등 매우 다양하였다. 이 모든 글들은 천주교의 교리와 도덕에 바탕을 두고 쓰여진 것으로, 당신 한국 교회의 신앙관과 윤리관을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1920-1930년대의 교회사 연구에도 값진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러나 1933년 3월 6일에 개최된 조선 5교구 주교회의에서 새로 창간되는 <가톨릭 청년>과 기존의 <경향잡지>만을 모든 교구의 잡지로 인정하고 기타 각 교구에서 발간되는 월보는 그 교구 안에만 한정된다고 결정됨으로써, 당시 재정난을 겪고 있던 <천주교회보>는 1933년 4월 1일에, <별>은 1933년 5월 10일 제71호를 끝으로 자진 폐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 자료 출처: <<한국 가톨릭 대사전>>, 5권,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