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구 산하 '가톨릭청년사'에서 발행하던 종교/교양 월간지
가톨릭 청년
창간호 표지
새로운 철자법의 사용과 조선말과 조선 글의 사용 원칙을 표방함으로써 독자들의 찬사를 받음.
<<가톨릭 청년>>은 1933년 6월 창간호가 간행된 이래 두 차례에 걸쳐 폐간과 복간을 거듭하다가 1971년 8월 <<창조>>로 개제되었다. 이 잡지의 발간은 1933년 3월 6일 개최된 전국 5개 교구 주교회의에서 '5교구 출판 위원회'를 구성함과 동시에 그 위원장으로 서울교구장 라리보(Larribeau, 元亨根) 주교를 선출하고, '기존의 잡지들을 통합하여 하나의 잡지로 간행한다'고 결정함에 따라 이루어지게 되었다.
당시 주교회의에서 이처럼 결정한 이유는 가톨릭 운동과 관련한 전교 방침을 일원화하려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가톨릭 청년>>에서는 우선 '그때까지 한국 교회 안에서 전개되어 온 가톨릭 운동을 통합하는 구심체 역할을 한다'는 일치의 정신에 간행 목적을 두게 되었으며, 이와 함께 대사회적 측면에서 교회 안의 교리 정립과 청년들의 신심 함양에 도움을 주고, 사회 계몽과 민족 문화의 발전에 보탬이 되고자 하였다.
[제1기(1933.6-1936.12)]
창간 당시의 편집, 발행인은 라리보 주교, 편집 주간은 윤형중 신부였고, 편집 실무 및 원고 작성은 주로 장면, 정지용, 장발, 이동구 등이 담당하였다. 그러나 이 잡지가 창간된 지 얼마 안되어 1934년 1월 평양교구에서 <<가톨릭 연구 강좌>>.(<가톨릭 조선>의 전신)이 창간되고, 연길교구에서 <<가톨릭 소년>>이 창간되었다. 또한 이 무렵부터 조선총독부의 언론 탄압이라는 외적 요인이 작용하게 되자 서울교구에서는 통권 43호를 끝으로 폐간을 결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잡지에서는 1934년 10월호(제2권 제10호)부터 새로운 철자법을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다음 호부터 조선말과 조선 글의 사용 원칙을 표방함으로써 독자들로부터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제2기(1947.4-1950.6)]
서울교구에서 <<가톨릭 청년>>을 부활시킨 것은 해방 후인 1947년 4월 이었다. 이때 면수는 전보다 증가되었다. '신앙과 사회 이념과의 결합' 즉 새로운 사회 생활에 맞는 청년지의 필요성 때문에 부활시킨 것이다. 따라서 그 내용이 종교, 사상,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하게 구성되었으며, 특히 정치와 민주주의의 이해 내지는 가톨릭 신앙의 해설에 중점이 두어짐으로써 그와 반대되는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비판 또한 여러 차례 게재되었다. 그러나 이 잡지는 복간 후 본래의 의도대로 발행될 수 없었다. 원고, 인쇄 문제 등으로 수차례 합병호를 내야만 했고, 그나마도 6.25 동란의 발발로 인해 1950년 6월호(통권 70호)는 배포조차 하지 못한 상태에서 발행이 중지되어야만 했다.
[제3기(1955.1-1971.7)]
1955년 1월 6.25 동란으로 발행이 중지되었던 이 잡지가 속간되었다. 속간 당시 잡지가 표방한 것은 '가톨릭 문화의 발전과 문서 전교', 더 나아가 '한국 문화 전반의 발전'에 밑바탕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 제3기의 <<가톨릭 청년>>은 제1기와 제2기에 비해 우선 면수를 100여 면으로 확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편집 체제와 내용 면에서도 새로운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아울러 윤형중 신부를 편집 겸 발행인으로 하고, 가톨릭청년사를 경향신문사 사옥 안에 두었으며, 집필진을 보완하여 교회 밖의 인사들까지 포함시킴으로써 내용을 다양화하였다. 이후 여기에 게재된 내용을 보면 논설, 교리와 교회사, 예술과 문예, 창작과 전기, 시사와 취미 등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제1기와 제2기에 비해 예술과 문예 면에 많은 지면이 할애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와서도 <<가톨릭 청년>>은 비록 그 지면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종교면을 등한시할 수 없었으며, 특집호 또한 주로 가톨릭 입장에서 구성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한계성 때문에 이 잡지는 결국 1971년에 사회 계몽지의 성격을 띤 <<창조>>로 제호를 바꾸면서 16년 만에 다시 폐간되었다.
* 자료 출처: <<한국 가톨릭 대사전>.1권,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