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일시 : 2006.03.07
하느님의 종 이성례 마리아가 동료들과 함께 처형된 당고개 성지 |
1801년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이성례 마리아는 내포 지역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 집안의 사람이다. 옥에 갇혀 고초를 겪고 있던 그녀에게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큰 것은 먹일 것이 없어 굶어 죽어가고 있는 아들에 대한 모성애였다. 남편이 온갖 고문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증거하다 옥사하였고, 더러운 감옥에서 젖먹이가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들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유학 중임이 알려져 다시 체포되어 형조에서 혹독한 고통을 겪게 되면서, 함께 갇혀 있던 동료들의 권면과 함께 용기를 얻어 다시 신앙을 증거하였다. "당시 젖먹이였던 스테파노는 어미의 형벌과 굶주림, 그리고 옥 안에서의 다른 궁핍들이 그를 쇠약하게 하여 그 아이는 무죄한 어린이 순교자들 가운데로 날아 올라갔다"<조선 순교사 비망기>에서
"... 죄인 이성례가 진술하기를 자신은 과천에서 살고 있으며, 자신의 아들 (최)양업이 사학을 배우기 위해 나가서 돌아오지 않은 것은 이제 3년이 되었는데, 이는 남편이 지시한 것으로 아들이 서양 나라에 들어갔는지의 여부를 자신은 실로 정확히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라고 하였다.<일성론 헌종 기해 8월 7일>"사학 죄인... 여인 이성례는 ... 이미 죽은 남편이 천당에 있음을 스스로 기약한다고 하니, 지극히 교악합니다. 어린 아들을 이역 땅으로 보내 인간의 정을 끊어 버렸습니다"라고 하였다.<일성록, 헌종 기해 12월 11일>
이성례 마리아는 감옥으로 찾아온 자식들에게 자신의 마음이 약해질 것을 우려하여 "형장에는 오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야고보는 시름없는 걸음으로 집에 돌아와 집안의 잔돈푼을 모아 가지고 모친께서 순교하신다는 당일에 옥사장이를 찾아갔다. 그리고 묻기를, 이번에 형을 집행하는 희광이가 누구냐고 하니, 아무개라 하는지라. 그 희광이를 찾아가서 가지고 있는 돈을 모두 주며 부탁하기를, 모습이 이러이러한 죄수는 우리 모친이시니, 칼을 갈아 형을 집행하되 각별히 조심해 주십시오라고 청하였다. 이에 무도한 희광이도 그를 칭찬하며 염려말라고 하였다. 형을 집행할 시간이 다가오자, 여러 죄수 순교자들을 당고개로 데리고 가 모아 놓고 차례로 형을 집행하여 참수하였다. 그리고는 한 곳에 시체를 모아 구덩이에 넣고, 길다란 가래로 묻는 것이었다. 어린 야고보는 먼 곳에서 이 정경을 보고는 실성하고 낙담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어린 동생들은 어머니가 언제 나오시냐?고 묻는 것이 아닌가?"<최우정 이력서에서>
"그녀는 아이들과 떨어지는 것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으나 아이들을 모두 돌려 보낸 후에 마지막까지 굳건하였고, 옥에서 6개월을 보낸 끝에 기쁘게 형장으로 갔으니, 그녀가 한때 비참하게 죄에 떨어졌던 일이 이 피 흘림으로써 씻겨졌으리라고 우리는 감히 희망한다. 그녀는 39세의 나이로 죽었다."<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사 비망기" 중에서> * 하느님의 종 이성례 마리아와 함께 처형된 동료들은 모두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