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일시 : 2006.06.01
하느님의 종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가족들이 살았던 초남이 생가 터 |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 경기도 양근에 살던 권일신을 만나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아 전라도 지역 최초의 신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과 식솔들, 그리고 종과 마름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는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많은 종들을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정을 베푸는 나눔의 생활을 실천하였다. 호남의 사도 유항검은 여느 양반들과 달리 그의 높은 덕망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또한 그는 가성직제의 부당함을 지적하였고, 이 땅에 성직자 영입을 위하여 혼신을 다하였다.
지체 높은 양반이면서 호남의 대부호였고, 출세를 위해 과거 시험에도 응시했던 유항검. 그는 당시 양반들이 그랬듯이 재물, 명예, 권력을 탐하던 마음을 청산하고 현세의 가치관에서 해방되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을 알게 되었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사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았다.
그는 하느님이 이 세상에서 주신 모든 것에서 자유로웠다. 가족제도에서 큰 아들은 집안의 기둥이었다. 그러나 그는 큰 아들 유중철 요한의 동정 성소를 허락하고 보호해 주었다. 그의 가족은 모두 순교하거나 어린 나이에 유배지에서 소문없이 죽었다. 그는 한 가정을 송두리째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유항검의 큰 아들 유중철은 16세가 되던 1975년, 주문모 신부가 초남 마을을 방문하였을 때 첫영성체를 하고, 동정 생활을 하겠다는 자신의 결심을 주 신부와 부친 앞에서 털어 놓았다.
그로부터 2년 뒤 주문모 신부는 한양에 살던 이순이 루갈다에게서 동정을 지키도록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고, 전주에 사는 요한을 생각하고는 둘의 혼인을 주선하였고, 그들은 부모 앞에서 동정 서약을 하고 오누이처럼 일생을 살겠다고 다짐하였다.
유중철 요한은 동정 서약을 어길 마음이 생길 때마다 루갈다와 함께 기도와 묵상으로 이를 극복해 나갔고, 함께 순교의 길을 나가자고 굳게 다짐하였다. 그들은 1801년 봄 신유박해로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히게 되었다.
박해가 일어나자 유항검은 전라도 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가장 일찍 체푀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포도청과 형조, 의금부를 차례로 거치면서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 했던 그는 전주로 옮겨져 1801년 10월 24일 전주 남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45세였다.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대역부도죄인 유항검, 모역동참죄인 유관검, 윤지헌 등을 이번 달 17일(양력 10월 24일)에 함께 능지처사했습니다.... 가산을 적몰하고 집을 파괴하여 연못으로 만들도록 하거나, 읍호를 강등시키고 수령을 파직하도록 하는 일은 청컨대 각 담당 관서로 하여금 승전을 받들어 거행하도록 하십시오." <일성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