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자료

[원주] 강원감영-최해성 요한
조사일시 : 2006.06.02
원주교구 현장조사 법정 개정
하느님의 종 최 비르짓다와 최해성 요한이 신앙을 증거한 강원 감영
관장이 여러 가지 말로 유혹하면서 배교를 권유하자 최해성 요한이 답했다. "제게 원주 지방을 다 주신다고 해도 저는 제 하느님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대답에 영장은 100대가 넘는 곤장을 때리게 하고는 그를 다시 옥으로 돌려 보냈다.
그의 생애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에 의해 프랑스에 보내진 바 있습니다.
저도 다른 이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살기를 원하고 죽기를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정의를 위하여 죽기를 사양하지 않습니다.... 마침내 사형 선고를 받고, 음력 1839년 7월 29일에 목이 잘려 29세의 나이로 순교하였습니다. 그가 천국으로 개선하는 마당으로 내려갈 날이 밝아 왔을 때, 그는 기쁨의 표시로 자기와 옥사쟁이들에게 작은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가 영광스럽게 최후의 형장으로 끌려나갈 때, 그동안 욕설을 퍼붓고 매질하고 형벌을 하던 포졸과 백성들이 그를 뒤쫓아가면서 눈물을 흘리며 그와 작별하였습니다.<최양업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56년 9월 13일자 서한 중에서>
영장은 최 비르짓다를 감옥에 가두고 굶어 죽게 놔두라고 명령했다. 이 명령은 제대로 실행되지 않아 그녀가 감옥의 고통 속에서 넉 달을 버티자, 영장은 다시 명령을 내리면서 사흘 안으로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가져오라고 덧붙였다. 이 사흘의 말미는 그녀의 생명을 꺼지게 하는데 충분하지 않았으므로 옥리들은 밤사이에 감옥으로 들어가 그녀가 목에 차고 있던 칼을 조여 교살시켰다. 때는 이해 음력 11월 3일(양력 12월 8일) 혹은 4일 밤이었으니, 즉 1839년 12월 이었다. 그녀의 나이 57세였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증거자의 월계관을 얻고 친아들처럼 진정으로 사랑했던 조카를 만나러 갔다.<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자 비망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