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자료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 묘소

조사일시 : 2007.01.03


... 뛰어난 재질을 가진 그는 몇 해 공부한 것으로 라틴어를 매우 정확하게 말하고 쓰게 되었습니다. 신학 공부를 마친 다음 상해에서 1849년 사제로 서품되어 같은 해에 조선에 잠입할 수가 있었고, 12년간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감화하고 성공적으로 영혼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1861년 9월 4일 베르뇌 주교가 알브랑 교장 신부에게 보낸 서한>

 

우리에게 그렇게도 귀중한 존재가 되었던 유일한 본방인 신부 최(양업) 토마스가 서울에 오던 중 지난 6월(15일)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복사가 막 저의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는 신부의 병에 관해 자세하게 말해 주었습니다. 실제로 지난 해의 소요(즉 경신박해)는 그의 성사 집전을 아주 어렵게 만들었고, 그래서 그는 낮에는 80리 내지 100리를 걸어야 하였으며, 밤에는 고해를 들어야 하고 또 날이 새기 전에 다시 떠나야 하였으므로 그가 한 달 동안에 취할 수 있었던 휴식은 나흘 밤을 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1861년 7월 26일 페롱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


그의 죽음은 조선 교회 전체의 초상입니다. 또 우리를 난처하게 만들었는데 우리는 종교 자유가 선포될 때까지는 이 곤경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남쪽의 오지에서 방문하던 지역들은 지금까지 서양 선교사들이 갈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한문 지식과 조선인으로서의 장점은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책을 번역하는 일에 그를 누구보다도 적격자로 만들었습니다. 저를 위해서는 이 죽음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1861년 7월 26일 페롱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


제가 해마다 짧게나마 페낭에 있는 조선 신학생들에게 서한을 보냈는데, 저들이 한 장도 받아 보지 못했다고 하니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들의 마지막 서한을 보면 고독하고 외로운 처지에 있는 그들이 여러 해 동안 저한테서 한 번도 위로의 서한을 받아 보지 못하였다고 저를 몹시 원망하고 있습니다.... <1857년 리브와 신부님께 보낸 최양업 신부님의 열네 번째 서한>지난 봄에 세 학생을 강남의 거룻배를 태워 상해로 보냈는데, 그들이 신학교(말레이시아의 페낭)까지 무사히 도착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건강하게 잘들 있는지요? 신학교 교장 신부님은 우리 신학생들 각각의 성격을 지금쯤 잘 파악하셨을 줄로 압니다마는... 학생들이 모두 그리스도인의 겸손을 잘 깨닫도록 이끌어 주십시오...<최양업 신부님의 열 번째 (1854년 11월 4일)서한 중에서>


존경하올 다블뤼 주교님께서는 조선 교회의 역사, 특히 우리 순교자들의 역사 편찬에 전력을 기울이고 계십니다. 푸르티에 신부님은 신학교 교장이시고, .. 매스트르 신부님과 프티니콜라 신부님과 저, 이렇게 셋만이 베느뢰 주교님을 도와 신자들의 사목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열네 번째 서한 중에서>제가 공소 방에 들어가 찰고를 받을 때 또 한 번 놀랐습니다. 겨우 8,9, 10세밖에 안된 어린 아이들이 교리문답 전체와 굉장히 긴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의 경문을 청산유수로 암송하여 외우는 광경은 신기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여러 사람들이, 그중에도 특히 노파들이 우둔함을 무릅쓰고 열성을 부리는 모습을 바라볼 때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재능도 부족하고 기억력도 흐려서 경문을 하루 종일 배우면서도 한마디로 입에 담지 못하며 애를 쓰는 모습이 안쓰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열다섯 번째 서한(1858. 10월 3일) 중에서>


... 금년에 저의 사목 순회 도중에 중단된 성무 집해의 연말 보고를 드립니다. 1,622명에게 고해성사를 주었고, 어른 203명에게 세례성사를 집전하였습니다. 신자들이 어른 임종자 13명에게 대세를 주었고, 예비자 398명이 등록하였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열아홉 번째 (마지막 서한) 중에서>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졸들의 포위망을 빠져 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포교지를 여러 신부님들의 끈질긴 염려와 지칠 줄 모르는 애덕에 거듭거듭 맡깁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열아홉 번째 서한(1860. 9. 3. 죽림에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