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자료

수리산 성지 (신학생 선발)

조사일시 : 2008. 5.20.

수리산 성지: 최양업 신부 가족의 거주지

조선 소년 2명을 보내겠디고 약속했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또 기회가 없을까 걱정이 되어 비록 저하고 4-5개월밖에 같이 있지는 않았지만, 세 번째 소년을 추가로 같이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그들의 성명을 도착순으로 소개하면, 지난 2월 6일에 최 토마스, 3월 14일에 최 프란치스코, 7월 11일에 김 안드레아가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의 부모들은 조선에서 가장 뛰어나 교우들입니다. 그러나 가난합니다. ... 이 소년들은 온순합니다. 마음에 드시길 바랍니다. 그들은 열심과 순명으로 공부에 전념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조선 신학교의 설립을 위해 제일 좋은 장소로 조선 소년들을 보내 주시고, 다음 편지에서 그 장소를 알려 주십시오... 그들에게 변문까지 가는 여비밖에 주지 못했습니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모방 신부가 그르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36년 12월 3일 서한 중에서>

최경한 프란치스코 성인의 묘소

저의 아버지는 최경환 프란치스코이고 저의 어머니는 이성례 마리아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고결하고 부유한 신자 부모한테서 출생하였습니다. ... 그는 천성적으로 진정한 신앙의 실천자였고, 정직과 순박을 애호하면서도 강력한 성품을 타고났습니다. ... 프란치스코는 (안양의 수리산) 교우촌의 회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절골에서 쓴 최양업 신부님의 여덟 번째 서한(1851년) 중에서>

수리산 담배촌의 옛모습

최양업 신부의 가족은 1832년 고향 충청도 홍주 다락골 새터를 떠난 뒤 서울 낙동(현 회현동 부근)을 거쳐 과천의 수리산 뒤뜸이(현 경기도 안양시 안양4동의 담배촌)에 정착하였다. 최양업 신부는 1836년 2월 6일 모방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간택되어 서울의 신부 댁에 도착하여 라틴어 수업을 받기 시작, 그해 12월 3일 동료 신학생들과 함께 모방 신부가 바라보는 가운데 십자가 앞에서 성서에 손을 얹고 순명과 복종 서약을 한 후, 정하상 바오로 성인과 조신철 가롤로 성인 등의 인도를 받아 변문으로 출발하였다.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의 유해

"형제들이여, 용기를 냅시다. .. 주님의 천사가 황금으로 만든 자를 가지고 우리의 모든 발걸음을 재고 계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장을 서서 십자가를 지시고 갈바리아 산으로 올라가시는 것을 생각합시다."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아내 마리아와 다섯 아들들과 함께 투옥되어 40일 이상의 참혹하고 지극히 혹독한 고문을 여러 차례 받으면서도 항구하게 신앙을 지켜 고문자들은 그를 바윗 덩어리라 불렀다. 그는 1839년 9월 12일에 서른 여섯의 나이로 감옥에서 순교하였다.

신부님께서 저에게 아쉬운 것이 있으면 청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아쉬운 것 투성이어서 어느 것을 먼저 청해야 할 지 모를 지경입니다. 무엇이든지 보내만 주시면 저에게는 다 필요하고 소용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보다 더 하느님의 자비가 저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를 위하여 저와 저의 가련한 조선 신자들을 신부님의 사랑이 넘치는 기도에 다시 의탁합니다.<최양업 신부님의 열두번째 서한(1856년 르그레즈와 신부님께)중에서>

프란치스코의 귀중한 시체는 옥졸들이 가마니에 넣어 노고산(현 서강대학교 뒷산) 밑에 갖다 버렸다. 그로부터 수일이 지난 뒤 프란치스코의 둘째 형인 영겸씨 부자는 그 시체를 찾아 노고산 중턱에 가매장하였는데, 이때 사기 사발 안에 이름을 기재하여 시체와 함께 묻었었다. 그리고 다시 여러 해 뒤에, 둘째 형 부자가 그 귀한 시체를 이장하고자 하여 노고산에 가 무덤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표시를 분명히 해두었건만, 기억이 희미하여 수많은 무덤 중에서 찾기가 어려웠다. 결국 3-4기의 무덤을 판 뒤에야 지석과 같은 사발을 발견함으로써 프란치스코의 유해를 찾아 과천 수리산의 뒤뜸이 앞산에 매장할 수 있었다. 이로부터 다시 수십년 만에, 조선의 순교 복자 79위가 승품될 때 함께 승품되었다. <최우정의 이력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