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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티성지 (사목 활동 중심지)

조사일시 : 2008. 5. 20.

"지금까지 우리의 모든 사업은 일시적이고 임시적으로 하는 것 뿐입니다. 가한 것과 불가한 것을 거스르지 않도록 공포에 떨면서 은밀히 몰래 행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영구적으로나 항구적으로나 정규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 신자들이 잘 지내던 교우촌이 내일 불시에 쑥밭으로 파괴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동료 사제들이 어느 곳에 거주한다든가, 무슨 성물이나 물건을 맡긴가든가 할 때 1개월 동안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곳이 아무데도 없습니다. 우리 교우들은 자리를 잡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나그네 모양으로 떠돌이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열일곱번째(1859년 10월) 서한 중에서>

 

최양업 신부의 임종지(이견 있음): 진천군 진천읍 건송리 일송정 공소 자리

우리는 한밤중의 매서운 추위를 피하기 위해 유숙했던 주막에서 쫓겨나 매를 흠씬 두들겨 맞고 또 의복이 찢어져 반쯤 나체가 되었고, 강추위로 몸이 꽁꽁 얼어붙었고, 눈이 깊이 쌓여 발은 무릎까지 푹푹 빠지고, 능욕과 고통으로 몸과 마음이 기진맥진하였습니다. 그러나 캄캄한 밤중이라서 우리의 처참한 꼴을 감출 수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비틀거리며 걸어가면서도 관가에서 풀려난 것만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비참을 능가하는 더 큰 위안이 있습니다. 더구나 그러한 노고와 고난 중에서도 그 안에 최고의 위안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사도적 생활의 보람이요 그것이 우리의 화관이기도 합니다.<최양업 신부님의 열일곱번째 서한 중에서>

 

최우정 바실리오(최양업 신부의 셋째 동생)가 살았던 동골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한 최양업 신부는 페레올 고 주교님의 분부대로 진천군 동골 교우촌에 거처하면서 점차 두 동생들(셋째와 넷째)의 혼인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 마침 기해녀(1839년)에 고초를 겪은 열심한 교우 송구현 도미니코의 장녀와 차녀가 현숙히 성장하였음을 보고는 최 신부가 청혼하게 되었다. 그러자 송 도미니코는 최 신부의 동생들이 교리 실천에 진실함을 보고 따님 형제의 혼인을 허락하였다. ... 최 신부가 가끔 그 동생 집에 오면, 종종 가족들을 데리고 그 선친 산소에 올라가 신공을 바쳤다. 우정(바시리오)은 수년을 진천 동골에서 살았다. <최우정 이력서 중에서>

 

배티 성지 성당

 

우리가 분노의 그릇이 되지 말고 하느님 자비의 아들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침내 언젠가는 천국에서 만나뵙게 될 하느님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도 뵙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비록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적어도 하느님 아버지를 영원히 떠나지 아니하도록, 저와 가련한 조선 신자들을 위해 많이 기도해 주십시오.<최양업 신부님의 열 번째 서한(1854년 동골에서) 중에서>

 

 

 

 

 

 

사백주일(부활 2주일, 4월 15일)에 지극히 공경하올 마레스카 주교님으로부터 저는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제가 그토록 고귀한 품위에 언제나 합당한 자로 처신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의 미천함과 연약함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크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지극히 너그러우신 하느님의 자비로 그 짐은 아주 달고 고무적인 것이 되어, 지극히 무능하고 가난한 제가 날마다 지극히 존엄하신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미사 성제를 드리고 온 세상의 이루 다 평가할 수 없는 값진 대가를 날마다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는 권능을 수여받았음은 큰 위로입니다."<1849년 5월, 상해에서 쓴 최양업 신부님의 여섯 번째 서한 중에서>

 

 

 

 

배티성지: 성당 겸 사제관 터

금년에는 하느님의 허락하심으로 다행히 연례 공소 순회를 일찍 마쳐서 잠시 동안 휴가를 얻었습니다. 제게 주어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렵니다. 순교자들의 행적을 여러 증인들의 말을 토대로 하여 정확히 기록하려 합니다.<1851년 절골에서 쓴 최양업 신부님의 여덟 번째 서한 중에서>

 

저는 조선에 들어온 후 한 번도 휴식을 취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7월 한 달 동안만 같은 집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고 언제나 시골 방방곡곡을 돌아 다녔습니다. 중국에서 서울까지 여행한 것을 빼고도 1월부터 지금까지 거의 5천리를 걸어 다녔습니다. 저는 이처럼 긴 여행과 이 모든 고된 일을 하면서도 하느님의 은혜로 건강은 늘 좋았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일곱 번째 서한 중에서: 1850년>

 

 

 

 

 

 

저는 밤에만 외교인들 모르게 교우촌에 도착하여야 하고, 공소 순회가 끝나면 한 밤중에 모든 일을 마치고 새벽녘에 동이 트기 전에 그곳을 떠나야 합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여덟 번째 서한 중에서: 1851년 절골에서>

 

 

 

 

 

 

 

저는 교우촌을 두루 순회하는 중에 지독한 가난에 찌든 사람들의 비참하고 궁핍한 처지를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저들을 도와 줄 능력이 도무지 없는 저의 초라한 꼴을 보고 한없이 가슴이 미어집니다.<최양업 신부님의 일곱 번째 편지에서: 1850년>

 

 

 

 

배티 성지 성모 동산

우리 학생 중 두 사람이 성모성심회원이 되고자 하는 의사를 제게 표명하였습니다. ... 아직 성품을 받지 않았다면 곧 받게 될 것이고, 또 그의 덕행과 재능으로 조선에 큰 희망이 되고 있는 조선인 학생으로 이름은 최(양업) 토마스입니다. 각자의 입회 허가서를 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자들을 통해 제게 보내주시기 바랍니다.<1843년 마카오에서 리브와 신부가 데쥬네트 신부에게 보낸 서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