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자료

최양업 신부와 신학당

조사일시 : 2008. 5.21.

매스트르 신부가 이전한 조선교구 신학교 자리

저는 그의 장례 준비로 매우 바쁩니다.

장례식은 며칠 후(11월 초) 저의 산의 한 작은 언덕에서 거행될 예정인데... 나의 오두막집이 큰 모임의 장소가 되게 되었습니다.

이런 모임이 이 지방에서는 드물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푸르티에 신부가 아브라이여 신부에게 보낸 1861년 서한 중에서>

존경하올 다블뤼 주교님께서는 조선 교회의 역사, 특히 우리 순교자들의 역사 편찬에 전력을 기울이고 계십니다.

푸르티에 신부님은 신학교 교장이시고... 메스트르 신부님과 프티니콜라 신부님과 저,

이렇게 셋만이 베르뇌 주교님을 도와 신자들의 사목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열네번째 서한 중에서>

지난 봄에 세 학생을 강남의 거룻배를 태워 상해로 보냈는데, 그들이 신학교(말레이시아의 페낭)까지 무사히 도착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건강하게 잘들 있는지요? 신학교 교장 신부님은 우리 신학생들 각각의 성격을 지금쯤 잘 파악하셨을 줄로 압니다마는...

학생들이 모두 그리스도인의 겸손을 잘 깨닫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최양업 신부님의 열 번째(1854년 11월) 서한 중에서>

 

제가 해마다 짧게나마 페낭에 있는 조선 신학생들에게 서한을 보냈는데,

저들이 한 장도 받아 보지 못했다고 하니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들의 마지막 서한을 보면 고독하고 외로운 처지에 있는 그들이

여러 해 동안 저한테서 한 번도 위로의 서한을 받아 보지 못하였다고 저를 몹시 원망하고 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열네 번째서한(1857년)중에서>

 

제가 공소 방에 들어가 찰고를 받을 때 또 한 번 놀랐습니다.

겨우 8,9,10세 밖에 안된 어린 아이들이

교리 문답 전체와 굉장히 긴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의 경문을 청산유수로 암송하여 외우는 광경은 신기하기 이를데 없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여러 사람들이, 그 중에도 특히 노파들이

우둔함을 무릅쓰고 열성을 부리는 모습을 바라볼 때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재능도 부족하고 기억력도 흐려서

경문을 하루 종일 배우면서도 한마디도 입에 담지 못하여 애를 쓰는 모습이 안쓰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열다섯 번째 서한(1858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