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자료

배론성지 (최양업 신부 묘소)

조사일시 : 2008. 5. 21.

 

주님께서 이 나라의 두 번째 사제를 보살피시어 어둠에서 벗어나 광명을 향하도록 하셨으니, 기이하고도 성대하도다.

뛰어난 재질을 가진 그는 몇 해 공부한 것으로 라틴어를 매우 정확하게 말하고 쓰게 되었습니다. 신학 공부를 마친 다음 상해에서 1849년 사제로 서품되어 같은 해에 조선에 잠입할 수 있었고, 12년간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감화하고 성공적으로 영혼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베르뇌 주교가 알브랑 교장 신부에게 보낸 1861년 9월 4일 서한 중에서>

 

최양업 신부님의 묘소

그의 굳건한 신심과 영혼의 구원을 위한 그의 불같은 열심, 그리고 무한히 귀중한 일로는 그의 훌륭한 분별력으로 우리에게 그렇게도 귀중한 존재가 되었던 우리의 유일한 본방인 신부 최(양업) 토마스가 구원의 열매를 맺은 성사 집행 후에, 내게 자기의 업적을 보고하려고 서울에 오던 중 지난 6월(15일)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베르뇌 주교가 알브랑 교장 신부에게 보낸 1861년 서한 중에서>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복사가 막 저희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는 신부의 병에 관해 자세하게 말해 주었습니다. 토마스 신부가 쓰러진 것은 다름 아닌 과로 때문이랍니다. 실제로 지난 해의 소요(즉 경신박해)는 그의 성사 집전을 아주 어렵게 만들었고, 그래서 그는 낮에는 80리 내지 100리를 걸어야 하였으며, 밤에는 고해를 들어야 하고 또 날이 새기 전에 다시 떠나야 했으므로 그가 한 달 동안에 취할 수 있었던 휴식은 나흘 밤을 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페롱 신부가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1857년 서한 중에서>

 

현장조사단의 묘소 참배

그의 죽음은 조선 교회 전체의 초상입니다. 또 우리를 난처하에 만들었는데 우리는 종교 자유가 선포될 때까지는 이 곤경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남쪽의 오지에서 방문하던 지역들은 지금까지 서양 선교사들이 갈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한문 지식과 조선인으로서의 장점은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책을 번역하는 일에 그를 누구보다도 적격자로 만들었습니다. 저를 위해서는 이 죽음이 무엇을 의미할까요?<페롱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61년 편지 중에서> 길이 5자 너비 2자의 비석에는 사제 토마스 최정구의 묘"라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