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일시 : 2006.05.09
해미 순교자들을 현양하는 해미 성지 |
해미의 순교자들은 내포의 신앙 공동체가 초기에 이미 보여주었던 것처럼 대부분 하층민 출신이었다. 그들은 천주교 신앙을 수용함으로써 양반 관료 체제로 대변되는 조선의 불평등 사회와 불합리한 유교 질서를 극복하거나 스스로의 인격을 신앙의 자유 안에서 보호하고자 했던 계층이었다. 그들이 갖은 문초와 형벌 가운데서도 끝까지 자신의 신앙을 고수한 이유는 양심과 신앙의 자유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려는 데 있었다.<홍성, 해미 성지 자료집>
한국 천주교회의 박해 1세기 동안 생매장형 순교자는 오직 홍주(지금의 홍성)와 해미의 순교사에서만 탄생하는데, 그 중에서 해미 생매장 터의 위치가 목격 증인들에 의해 구전으로 전해져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1932년 서산의 상흥리 본당에 부임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바로(P. Barraux)신부가 누구보다 먼저 여기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홍성, 해미 성지 자료집>
어느날 저녁 무렵에 사령들이 사람 수십 명을 길게 엮어서 끌고 조그마한 길로 바다를 향해 가니 저게 웬일일까?... 거기에 구덩이를 몇개 파고서 끌고 온 사람들을 묻어 죽이려는 것이다. 끌고 온 이 사람들을 구덩이 옆에 세우고 지금이라고 교를 믿지 않는다고 하고 예수와 마리아를 욕들 하여라. 지금이라도 놓아주마하였다. 그래도 오히려 공경스럽게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죽으면 천당으로 간다고 하므로 목도 매어 죽이고, 그대로 산 채로 파묻기도 하였는데, ... 묶어서 산채로 묻어 죽이는 그 틈에는 처녀들도 많이 섞였다 하며...<홍성, 해미 성지 자료집>
순교자들을 고문하고 처형했던 해미 읍성에는 교우들이 갇혀 있던 감옥터가 있고 그 옆에는 고문대로 쓰던 호야나무가 남아 있다. 이 나무 위에 머리채를 묶인 순교자들이 매달려 모진 고문을 당했던 것이다.<하늘에서 땅 끝까지>
성 중앙에는 담을 길이 반이나 넘도록 싸서 돌린 3칸의 기와집이 있으니 그것이 옥이다. 남쪽으로 문 하나가 있는데, 거기로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3,40명 가량이나 갇혀 있다. 그 담 밖에는 큰 고목이 하나 서 있으니... 그 옆에 바깥 옥이 또 있으니 역시 3칸 기와집이다.<홍성, 해미 성지 자료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