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일시 : 2006.08.05
최양업 신부님 동상
저는 조선에 들어온 후 한 번도 휴식을 취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7월 한 달 동안만 같은 집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고 언제나 시골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습니다. 중국에서 서울까지 여행한 것을 빼고도 1월부터 지금까지 거의 5천리를 걸어 다녔습니다. 저는 이처럼 긴 여행과 이 모든 고된 일을 하면서도 하느님의 은혜로 건강은 늘 좋았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일곱 번째 서한(1850. 10. 1) 중에서>
성당, 사제관 터 |
저는 밤에만 외교인들 모르게 교우촌에 도착하여야 하고, 공소 순회가 끝나면 한밤중에 모든 일을 마치고 새벽녘에 동이 트기 전에 그곳을 떠나야 합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여덞 번째 서한(1851. 10. 15) 중에서)
제가 담당하는 조선 5도에는 매우 험준한 조선의 알프스 산맥이 도처에 있습니다. 저의 관할 신자들은 깎아지른 듯이 높은 산들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근접할 수 없는 깊은 골짜기마다 조금씩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사흘이나 나흘씩 기를 쓰고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가봐야 고작 40명이나 50명이 있어도 그들 모든 신자들에게 하루 안에 고해 성사를 집전해 주어야 합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여덟 번째 서한 중에서>
배티 성지 성모 동산 |
우리 학생 중 두 사람이 성모성심회원이 되고자 하는 의사를 제게 표명하였습니다. ... 또 하나는 아직 성품을 받지 않았다면 곧 받게 될 것이고, 또 그의 덕행과 재능으로 조선에 큰 희망이 되고 있는 조선인 학생으로 이름은 최(양업) 토마스입니다. <1843년 6월 마카오에서 리브와 신부가 데쥬네트 신부에게 보낸 서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