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일시 : 2008. 5. 22.
저는 박해의 폭풍을 피해 조선의 맨 구석 한 모퉁이에 갇혀서 교우들과 아무런 연락도 못하고 있습니다. ... 포졸들이 사방으로 파견되어 선교사 신부님들의 흔적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죽림에서 쓴 최양업 신부님의 열아홉번째 서한(1860년) 중에서>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졸들의 포위망을 빠져 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포교지를 여러 신부님들의 끈질긴 염려와 지칠줄 모르는 애덕에 거듭거듭 맡깁니다.<최양업 신부님의 열아홉번째(마지막) 서한 중에서: 1860년 죽림에서>
제가 담당하는 조선 5도에는 매우 험준한 조선의 알프스 산맥이 도처에 있습니다. 저의 관할 신자들은 깍아지른듯이 높은 산들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근접할 수 없는 깊은 골짜기마다 조금씩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사흘이나 나흘씩 기를 쓰고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가봐야 고작 40명이나 50명쯤 되는 신자들을 만날 뿐입니다. 제가 담당하는 그러한 공소 즉 교우촌이 자그만치 127개나 되고, 그러한 촌락에서 세례명을 가진 이들을 다 합하면 5,936명이나 됩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여덟 번째 서한: 1851년>
저들은 동포들로부터 오는 박해, 부모들로부터 오는 박해, 배우자들로부터 오는 박해뿐 아니라, 친척들과 이웃들로부터도 박해를 받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 험준한 산 속으로 들어가 이루 형언할 수 없이 초라한 움막을 짓고 2년이나 3년 동안 만이라도 마음놓고 편안히 살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일곱 번째 서한 중에서: 1850년>
죽림굴은 천연 석굴로된 박해시대의 공소(1840-1868년)로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피신하였던 곳이다. 이 천연 석굴 공소는 대나무와 풀로 덮혔고, 낮은 입구 덕분에 눈에 잘 띄지 않아 은신하기에 용이하여 많은 순교자들과 증거자들의 은신처로 이용되었다. 포졸들이 재 넘어 간월골에 나타나면 모든 교우가 이 굴 안에 들어와 숨었고, 연기를 내지 않기 위해 곡식을 구유에 넣어 물에 불려 생식을 하면서 은신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토기와 목기를 만들고 숯을 구워 생계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1840년부터 1860년 사이에는 샤스탕 정 신부, 다블뤼 안 신부가 사목을 담당하였다. 특히 경신박해(1860년) 때는 박해를 피해 최양업 신부가 여기에서 3개월간 은신하면서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집전하고, 자신의 마지막 편지를 쓰기도 하였다.<부산교구 설정 50주년 기념: 순교, 신앙 사적지>에서
경신박해 때 이 지방에서 20여명이 체포되었고, 병인박해 여파로 1868년 교우들이 대거 체포되는 등 100여명이 넘던 신자들이 박해로 사방으로 흩어져 대재공소는 폐쇄되고 말았다. <부산교구 설정 50주년 기념: 순교, 신앙 사적지>에서
언양 성당 신앙 유물전시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