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양 죽림굴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은신처
마지막 서한 발신지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졸들의 포위망을 빠져 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1860년 9월 3일, 죽림에서 쓴 최양업 신부의 마지막 서한 일부
"리브와 신부님과 르그레즈와 신부님께, 지극히 공경하고 경애하올 신부님께
먼저 두 분 신부님들께 공동 서한을 보내 드리는 것에 대하여 용서를 청합니다. 이 작은 서한을 두 분께뿐 아니라 모든 경애하올 신부님들께 이렇게 한꺼번에 보내 드릴 수밖에 없는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저는 박해의 폭풍을 피해 조선의 맨 구석 한 모퉁이에 갇혀서 교우들과 아무런 연락도 못하고 있습니다. 벌써 여러 달 전부터 주교님과 다른 선교사 신부님들과도 소식이 끊겨져, 그분들이 아직 살아 계신지 아닌지조차 모릅니다. 이 서한이 중국에까지 전달될 수 있을런지도 의심됩니다......"
- 최양업 신부의 서한, 마지막 편지인 열아홉 번째 서한 중에서
죽림굴(대재공소)은 천연 석굴로 이루어져, 1839년 기해박해 이후 박해를 피해 충청도 일원과 영남 각처에서 피난해 온 교우들과 간월의 교우들이 좀 더 안전한 곳을 찾아가 발견한 박해시대의 공소이다.
이곳은 언양 지방의 첫 공소인 간월 공소에 이은 두 번째 공소로, 현재는 경남 울주군 간월산 정상 가까이에 위치한다. 폭 7m, 높이 1.2m 크기의 작은 동굴로, 낮은 입구 덕분에 눈에 잘 띄지 않아 은신하기에 용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당시에도 포졸들이 재 넘어 간월골에 나타나면 교우들은 이곳에 숨어 지내면서 연기를 내지 않기 위해 곡식을 구유에 넣어 물에 불려 생식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최양업 신부는 1860년 경신박해 때 3개월 동안 죽림에서 은신했다.
최양업 신부의 마지막 서한의 맺음 부분
" ...... 우리를 재난에서 구원하소서. 엄청난 환난이 우리에게 너무도 모질게 덮쳐왔습니다. ......당신이 높은 데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을 대항하여 설 수가 없습니다. 지극히 경애하올 신부님들께서 열절한 기도로 우리를 위하여 전능하신 하느님과 성모님께로부터 도움을 얻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졸들의 포위망을 빠져 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포교지를 여러 신부님들의 끈질길 염려와 지칠 줄 모르는 애덕에 거듭거듭 맡깁니다. 금년에 저의 사목 순회 도중에 중단된 성무 집행의 연말 보고를 드립니다. 1,622명에게 고해성사를 주었고, 어른 203명에게 세례성사를 집전하였습니다. 신자들이 어른 임종자 13명에게 대세를 주었고, 예비자 398명이 등록하였습니다.
지극히 겸손하고 순종하는 종, 조선 포교지 탁덕 최 토마스가 올립니다."
- 최양업 신부의 서한 중에서
최양업 신부는 1859년 동래 지역의 예비신자들을 찾아가 세례를 주기도 했으며, 1859~1860년의 경신박해 때 죽림 교우촌에 피신하여 <스승 신부들에게 보낸 1860년 9월 3일자 마지막 서한>을 작성하였다.
대나무와 풀로 덮혀 있는 산 중에 난 작고 낮은 굴 입구는 쉽게 눈에 띄지 않아 신자들이 피신해 있기에 적합했다. 약 성인 1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근처 지방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큰 굴이다. 죽림의 대재 공소는 샤스탕 신부와 다블뤼 신부가 1840년부터 1860년까지 사목을 담당했던 곳이며, 1860년 경신박해 때는 박해를 피해 들어온 최양업 신부가 3개월간 은신했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울산 장대에서 처형된 3명의 순교자(허인백, 이양등, 김종륜)가 한때 이곳에서 머물렀다. 이후 경신박해와 벽인박해의 여파로 교우들이 대거 체포되면서 100여 명의 신자들이 사방 각지로 흩어져 대재공소는 폐쇄되었다.
'영남의 알프스'라고도 불리우는 죽림굴은 현재도 비포장 도로와 굴곡과 매우 가파른 길이 많아 운전에도 상당히 주의가 필요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