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전에 의한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선종지 -
"죽어가는 그의 입술에서 아직 새어나오는 말이 다만 두 마디 있었으니
그것은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이었습니다"
- 영남의 관문 새재와 이화령 고개 갈림길의 진안리에 세워진 표지석 -
* 문경시 문경읍에서 문경관문 방향으로 1km 정도의 거리에 한국 교회의 두 번째 사제요, '땀의 순교자', '한국의 바오로 사도' 등으로 불리우는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선종했다고 전해지는 진안리 성지가 있다.
* 충북과 경계를 이루는 영남의 관문으로 일명 "새재"라고 하는 조령은 옛날 영남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통로이며 군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요새이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숙종 34년(1708년)에 영남의 현관인 이곳에 관문과 성벽을 축조하였다.
* 최양업 신부와 선교사들도 몰래 충청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며 선교 활동을 하였고, 교우들도 박해를 피하기 위한 피난길로 이용했던 곳이다.
* 최양업 신부의 선종 소식을 전하고 있는 스승과 동료 성직자들의 서한에 의하면, 구체적인 장소에 대한 언급이 없다. 다만 "나(푸르티에 신부)의 거처에서 17리외 내지 18리외 떨어진", "신학교에서 12리외 정도 떨어진 한 작은 교우촌" 등의 내용으로 나타날 뿐이다.
- 최양업 신부의 선종 소식을 전하는 페롱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61년 7월 26일자 서한 -
" 경애하올 신부님,
올해는 몹시 애통해 하며 편지를 드립니다. 우리는 우리 선교사들 중에서 제일 귀중한, 또 신부님께서도 당연하게 매우 사랑하신 착한(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신부는 공소 순방을 마치고 (베르뇌) 주교님한테로 가는 길이었는데, 도중에 티푸스에 걸려 며칠 만에 사망하였습니다. 매우 다행하게도 그는 (배론) 신학교에서 약 120리 떨어진 한 작은 교우촌에 도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푸르티에 신부는 통지는 받고 그에게 마지막 사죄경을 염해 주고 종부성사를 주기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의식을 거의 완전히 잃었기 때문에 고해성사는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주 성모님에 대한 깊은 신심을 드러낼 만큼 아직 의식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숨을 거둘 때까지 예수 마리아를 부르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조선 교회 전체의 초상입니다. 또 우리를 난처하게 만들었는데 우리는 종교 자유가 선포될 때까지는 이 곤경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남쪽의 오지에서 방문하던 지역들은 지금까지 서양 선교사들이 갈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
- 추신: 8월 9일,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복사가 막 저의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는 신부의 병에 관해 자세하게 말해 주었습니다. 토마스 신부가 쓰러진 것은 다름 아닌 과로 때문이랍니다. 실제로 지난 해의 소요(경신박해)는 그의 성사 집전을 아주 어렵게 만들었고, 그래서 그는 낮에는 80리 내지 100리를 걸어야 하였으며, 밤에는 고해를 들어야 하고 또 날이 새기 전에 다시 떠나야 하였으므로 그가 한 달 동안에 취할 수 있었던 휴식은 나흘 밤을 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 <스승과 동료 성직자들의 서한: 페롱 신부의 1861년 7월 26일 서한 일부> -
- 최양업 신부의 발병지로 추정되는 새재 주막자리 일대 -
-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시복시성을 위한 기도를 바치는 현장 조사단 -
< 진안리 성지 순례 안내>
* 관할 문경 성당에 문의 (054) 572-0532
* 기타 사항: 주차장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