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 지역에 복음을 전한
복자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아들 홍인 레오
" '예수가 강생하였다'는 설은 예로부터 중국의 성현이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인데,
저는 이 책을 자세히 보았으므로 그 설을 독실히 믿는 것입니다.
그 지극한 이치의 소재를 말하자면
시,서,역경의 말이 모두 이와 합치하니 이를 사학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 <추안 및 국안> 신유 2월 20일, 홍교만 -
- 포천 감옥과 형방 터(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청군로3290번길 16) 일대 -
* 경기도 포천은 복자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그의 아들 홍인 레오가 한양에서 이주해 와 살면서 양근에 살던 권일신을 통해 천주교 교리를 알게 되고, 이 지역에 복음을 널리 전하던 곳이다.
홍교만과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사돈 간으로 정약종의 아들 정철상 가롤로는 그의 사위이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사돈 정약종의 책 상자를 자신의 집에 숨겨 두기도 하였다. 한 신자가 책 상자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과정에 박해자들에게 발각되는 사건(책롱사건)을 통하여 체포된 그는 의금부로 압송되었다가 문초와 형벌을 받고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을 받았다. 그의 나이 63세였다.
그의 아들 홍인 레오도 피신해 있다가 체포되었는데, 부친은 한양으로 그는 포천으로 압송되어 형벌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굳게 지켰다. 홍인은 경기 감영을 거쳐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그의 부친이 한양에서 순교한지 얼마 안되어 그도 포도청과 형조에서 형벌을 받은 후 사형 판결을 받고 고향 포천으로 이송되어 참수형을 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44세였다. 성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사 비망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그(홍인)가 죽은 후에 큰 광채가 그의 시신을 에워싸서 그는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였으며, 이를 본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였고, 특히 포졸들은 끊임없이 '참으로 기이한 일이로다'를 되뇌었다"
- 성 다블뤼 주교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에 수록된 홍교만의 기록 일부-
* <조선 주교 순교자 약전>에는 그의 세례명이 '아우구스티노'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조선 순교사 비망기>와 황사영 <백서>에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로 나온다.
- 성 다블뤼 주교 <조선 순교사 비망기>에 수록된 홍인 레오의 기록 일부 -
- 포천 관아 터(현 군내면사무소)에서 지역 자료들을 검토하는 현장 조사단(2006년 8월) -
- 홍인 레오의 포도청에서의 진술과 신문 내용이 담긴 <사학징의> -
- 그들은 포천에서 경기감영, 포도청, 의금부, 형조를 거치며 '사학 죄인'으로 불리우며
혹독한 형벌로 인한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증언하였다.
아버지는 서소문 밖 형장에서,
아들은 고향 포천으로 보내져 그곳의 형장에서 죽임을 당했다. -
- 홍인 레오가 죽임을 당한 형장터로 추정되는 구읍천 주변 일대 -
( 포천시 군내면 호국로 1564 (구읍리 723-5) 포천경찰서 옆 구읍천 주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