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론 성지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묘 황사영 백서 토굴 성 요셉 신학당

(*사진 출처: 원주교구 홈페이지)
배론 교우촌
'배론'은 마을 골짜기의 모습이이 배밑창을 닮았다는 데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1800년대 박해를 피해 이곳에 숨어들어온 천주교인들이 모여 형성된 오래된 교우촌이다. 배론에서 교우들은 화전을 일구고 옹기를 구워 생활하면서 신앙 생활을 이어나갔다.

(*사진 출처: 배론성지 홈페이지)
최양업 토마스 신부(1821-1861) 묘소
우리나라 두번째 사제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묘소가 배론 성지 경내에 모셔져 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과 이성례 마리아 복자의 장남으로 태어나, 1836년 12월 김대건 안드레아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다. 1849년 4월 15일 중국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고 우여곡절 끝에 1849년 12월 말 조선을 떠난 지 13년 만에 마침내 고국 땅을 밟았다.
최양업 신부는 귀국 직후부터 한시도 쉬지 못하고 심심산골 흩어진 교우들을 찾아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고, 프랑스 선교사들이 다닐 수 없는 지역들을 도맡아 해마다 7천리가 넘는 산길을 다니며 선종할 때까지 12년 동안 전국 120여 곳의 교우촌을 순방하였다. 사목 방문을 하지 못하는 시기에는 한문 교리서와 기도서를 한글로 옮기고 순교자 행적을 수집 기록하는 등 박해로 무너진 교회 재건을 위하여 헌신하다 1861년 6월 15일 과로와 장티푸스로 충북 진천(또는 경북 문경)에서 선종하였다. 최양업 신부의 시신은 1861년 11월 초 이곳 배론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황사영 백서 토굴

황사영 토굴과 토굴 내 전시된 '백서' 사본
하느님의 종 황사영 알렉시오와 백서(帛書)
하느님의 종 황사영 알렉시오(1775-1801)는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이미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던 황 알렉시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다. 황사영 알렉시오는 박해를 피해 제천 배론에 있는 김귀동의 집으로 가서 토굴에 은거하였고, 이곳 배론에서 신앙의 자유를 얻고자 교회를 재건할 방책을 생각하며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는 <백서>를 집필하였다.
황사영 알렉시오가 <백서>를 완성한 것은 1801년 10월 29일이다. 이 <백서>를 황심 토마스를 통해 옥천희 요한에게 전달된 뒤 북경 교회에 보낼 계획이었다. 그러나 옥 요한은 6월 의주에서 체포되었고, 황 토마스도 10월 22일에 체포된 뒤였다. 황사영 알렉시오도 11월 5일 배론에서 체포되면서 <백서>도 압수되었다. 그는 심문 과정에서 <백서>를 작성한 목적은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박해자들은 <백서>를 흉서로 보았고, 황 알렉시오를 반역자로 지목하여 결국대역부도의 판결, 곧 나라에 큰 죄를 지어 도리를 크게 어긋났다는 판결을 내렸다. 황 알렉시오는 1801년 12월 10일 26세의 나이에 서소문밖에서 능지처사형으로 순교하였다.
"천주교는 올바르며 나라와 백성에게 해가 되지 않는 종교입니다." - 황사영 알렉시오-
'백서'(帛書)는 비단(帛)에 씌어진 글(書)을 뜻한다. 가로 62cm, 세로 38cm의 흰 명주에 깨알같은 작은 붓글씨로 씌여 있고, 총 122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행마다 글자수는 96~124자이다. 주요 내용은 1791년 신해박해와 1801년 신유박해 과정과 순교자들에 대한 행적을 기록하고 있고, 교회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황 알렉시오가 체포될 당시 함께 압수된 <백서>는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옛 문서 파기를 위한 문서 정리 과정에서 발견되어 뮈텔 주교가 입수한 뒤 1925년 순교 복자 79위 시복 때 로마로 보내졌으며, 현재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뮈텔 주교는 <백서>의 원본을 로마로 보내기에 앞서 실물 크기대로 동판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 '백서'에 대한 자세한 설명 (링크)]
성 요셉 신학당(1855~1866)

신학당 터 표지석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배론의 교우촌이 파괴된 이후 다시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1840년대이다. 경기도 수원 출신 장주기 요셉이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1843년 배론에 정착하였는데, 1855년 초 장주기 요셉이 자신의 집을 신학당으로 봉헌하자 메스트르 신부(Joseph Maistre, 1808-1857)가 이곳 배론에 '성 요셉 신학당'을 세웠다.
이 '성 요셉 신학당'은 한국교회 최초로 격식을 갖추어 설립된 신학교로, 1887년 설립된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의 전신이다. 1855년 당시 장주기 요셉은 이곳 집 주인으로 신학생들의 한문 지도를 맡았고, 1855년 조선에 입국한 푸르티에 신부가 신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어 신학교를 맡았으며, 병환으로 요양을 겸하여 이곳에 온 프티니콜라 신부가 교수를 겸하였다.
성 요셉 신학당 설립 직후 학생 수는 6명이었고, 4년 후인 1859년 말에는 7명이 되었다. 이어 페낭 신학교로 가서 공부하던 3명의 신학생 가운데 1861년에 1명, 1863년에 2명이 귀국하여 모두 배론 신학교로 편입하여 학생 수가 9-10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하지만 병인박해로 장주기 요셉과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가 모두 순교하면서 신학교의 문이 닫혔다. 박해 이후에도 신학생 양성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고, 신앙의 자유를 얻은 1882년부터 다시 페낭 신학교에 신학생들을 파견하였으며, 마침내 1885년 경기도 여주 부엉골에 '예수성심신학교'를 세웠다. 이 '예수성심신학교'는 부엉골에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오래 운영되지 못하였으나, 1886년 한불조약이 체결되면서 1887년 3월 서울 용산 함벽정으로 옮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