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론성지
박해 시대의 교우촌
한국교회 두 번째 사제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묘소가 있는 곳
황사영 백서가 작성된 곳
성직자 양성을 위한 성 요셉 신학교가 설립된 곳
배론성지 전경
'배론'이란 명칭은 골짜기의 형상이 뱃바닥 같다는 것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본디 팔송정 도점촌으로 1890년대 이래 현재의 행정 구역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 현양탑 | 황사영 <백서>가 쓰여진 토굴 | 황사영 <백서>
교우촌 형성과 황사영 <백서>
배론 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791년 신해박해부터 1801년 신유박해 즈음으로, 주로 옹기를 만들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박해로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고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순교하자, 당시 지도자로 활동하던 황사영은 김한빈 베드로와 함께 1801년 2월, 서울을 떠나 경상도(예천)와 강원도를 거쳐 배론으로 숨어 들게 되었다. 이어 교회의 밀사로 활약하던 황심 토마스도 배론에 머물러 함께 생활하였다. 당시 배론에서 옹기점을 운영하던 신자 김귀동이 그들을 맞이하며 옹기점 뒤에 토굴을 파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다.
황사영은 토굴에 은신하며 직접 보고들은 순교 사적을 비롯하여, 김한빈과 황심 등이 전해주는 박해 사실을 문서로 한 <백서>를 작성하여 북경 주교에게 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전달책인 밀사 옥천희 요한이 8월 무렵, 북경에서 돌아오는 길에 봉황성 책문에서 체포되었고, 그의 밀고로 9월 15일(양력 10월 22일) 황심이 체포되었다. 이어 9월 29일에는 황사영과 김한빈이 배론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집 주인 김귀동 또한 체포되었다. 그 결과 <백서>는 포졸들에게 압수되어 관련된 신자들이 모두 처형되면서 배론 교우촌도 파괴되었다.
배론성지 뒷산 최양업 신부 묘소로 향하는 언덕 입구에 세워진 동상 (동상 하단에 새겨진 사향가)
하느님의 종 최양업 신부 시복 시성을 위한 현장 조사단의 묘소 참배
1988년 6월에 복원된 배론 신학교와 배론학당 당시 모습
성요셉 신학교의 설립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배론의 교우촌이 파괴된 이후 다시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1840년대였다. 경기도 수원 출신 장주기 요셉이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1843년 배론에 정착하였고, 1855년 초에는 한국 천주교회의 장상 역할을 하던 메스트르 신부가 이곳 교우촌에 '성 요셉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신학교가 바로 한국교회 최초로(격식을 갖추어) 설립된 신학교였다. 이때 메스트르 신부는 장주기 요셉에게 첫 입학생 세 명의 한문 지도를 부탁하였고, 이듬해 3월에 푸르티에 신부가 입국하자 그를 교장으로 임명하였다. 푸르티에 신부는 1856년 8월 15일에 배론에 도착하였다.
신학교 설립 직후 학생 수는 여섯 명으로 늘어났고, 4년 후인 1859년 말에는 일곱 명이 되었다. 이어, 페낭 신학교로 가서 공부하던 3명의 신학생들 가운데 1861년에 한 명, 1863년에 두 명이 귀국 후 모두 배론 신학교로 편입하여 학생 수가 10에 이르렀다가 한 명이 환속하여 아홉 명이 되었다.
배론 신학교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박해로 장주기,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가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는 3월 11일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으며, 장주기는 3월 30일 충청도 갈매못에서 다블뤼 주교 등과 함께 순교하였다.
신학교가 폐쇄되자 신학생들이 뿔뿔이 흩어져, 어렵게 설립한 배론 신학교는 그 명맥이 끊어졌다. 배론 교우촌은 박해가 끝나고 재건되어 공소로 설정되었으며, 1942년 12월에는 공소 신자들이 최양업 신부를 추모하기 위해 그 묘비를 제작하였다.
- 자료 출처: 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가톨릭대사전> -
1861년 9월 4일 베르뇌 주교가 알브랑 교장 신부에게 보낸 서한
" ...... 그의 굳건한 신심과 영혼의 구원을 위한 그의 불같은 열심, 그리고 무한히 귀중한 일로는 그의 훌륭한 분별력으로 우리에게 그렇게도 귀중한 존재가 되었던 우리의 유일한 본방인 신부 최(양업) 토마스가 구원의 열매를 풍성히 맺은 성사 집행 후에, 내게 자기의 업적을 보고하려고 서울에 오던 중 지난 6월(15일)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 죽어가는 그의 입술에서 아직 새어 나오는 말이 다만 두 마디 있었으니 그것은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이었습니다. 최 신부는 거룩한 기억을 남긴 모방 신부가 1837년에 가경자 김(대건) 안드레아와 함께 마카오에 보냈습니다. 뛰어난 재질을 가진 그는 몇 해 공부한 것으로 라틴어를 매우 정확하게 말하고 쓰게 되었습니다. ...... 그의 죽음은 저를 몹시 난처하게 합니다. 그가 성무를 집행하던 구역에는 크나큰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는 서양 사람이 뚦고 들어가기 어려운 많은 마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를 우리에게서 빼앗아가신 천주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
- 베르뇌 주교의 서한 중에서 -
배론성지의 최양업 토마스 신부 기념 성당
배론성지 성당 내부와 소성당 제대에 안치된 성 장주기 요셉의 유해
* 성지순례 및 미사 등의 안내는 배론성지 홈페이지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