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목정
병인박해 순교자 허인백 야고보, 김종륜 루카, 이양등 베드로 가족의 은신처와 가묘
- 허인백, 김종륜, 이양등이 그들 가족과 함께 숨어 지내던 경주 단석산 범굴 입구 -
범굴과 울산 장대 처형장의 허인백의 아내 박조예
* 허인백 야고보, 김종륜 루카, 이양등 베드로 세 사람은 죽령(현 경남 울산시 상북면 이천리의 '대재')에 살다가 가족들을 데리고 박해를 피해 다시 피신처를 찾아 심산궁곡의 암굴을 찾아 이주했다. 암굴은 현재 경주시 산내면 내일리 소태동의 단석산에 있는 '범굴'이라고 한다.
1868년 이들은 경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경주를 끌려가 심한 문초를 받고 울산으로 이송되어 그곳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현 울산시 병영동)에서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 이들이 십자 성호를 긋고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부르면서 장렬하게 순교한 형장에는 그곳까지 따라온 허인백의 아내가 있었다.
순교의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던 허인백의 아내 박조예는 날이 어두워지자 시신을 지키고있던 포졸들에게 술 대접을 하여 그들이 술에 취해 잠든 사이에 장대 끝에 높이 매달려 있던 세 순교자의 머리를 다시 그 몸둥이에 붙여 형장에 버려둔 시체를 날이 밝을 때 미리 보아둔 강둑의 구덩이에다 3인의 머리를 치마에 싸서 갖다두고, 3구의 시체를 하나씩 업어서 각각의 머리에 맞춰 넣은 다음 손으로 모래를 깊이 파고 3구의 시체를 가지런히 한 곳에 모시고, 그의 피묻은 치마를 벗어 면상을 덮어 안장하였다.
이렇게 밤새도록 임시 가매장을 하고 나자 그 이틑날 동이 트고 날이 밝기 시작했다. 그녀는 남들이 모르게 무덤에 바위로 표시를 해두고는 그곳을 떠나 자녀들이 기다리고 있던 범굴로 돌아왔다. 그후 그는 매년 그 매장한 무덤에 혹 장마에 물이 차서 떠내려가지 않았나 하는 걱정을 하며 몰래 가보았다.
그후 1886년 한불수호조약이 체결되고 공식적인 박해가 끝나고, 1894년 12월 16일 갑오경장에 고종 황제의 칙령으로 많은 순교자들의 신원이 회복되었다. 나라에서 순교자들의 시신을 옮겨가라는 통보를 해 옴에 따라 울산 장대 강둑에 임시 가매장 되었던 허인백 야고보, 이양등 베드로, 김종륜 루카 3인의 시신을 박조예 여사의 주선으로 김종륜 루카의 가까운 친척들이 살고 있는 경주 진목정의 도매산 뒷산으로 이장했다.
그후 1932년 5월 26일~28일 사이에 세 순교자의 유해는 대구 월배 성당 공동묘지 구역으로 이장되었다가 1962년 10월 25일 감천리 신자 공동묘지 내에 있는 성모상 앞으로 이장했다. 1968년 병인년 순교기념성당이 완공됨에 따라 세 순교자의 유해는 다시 대구 신천동 복자 성당 영내로 이장되어 오늘에 이른다.
- 울산 장대에서 참수된 후 그곳 강둑에 가매장되었다 진목정 공소 뒤에 안장되었던 세 순교자의 가묘 -
- 진목 공소 내부 -
* 경주 산내면의 산중에 위치한 진목정은 1860년경부터 교우들이 모여 살았던 대표적인 신자 마을의 하나이다. 다블뤼 주교를 비롯한 영남의 전교 신부들이 이곳의 사목을 담당했으며, 1893년 11월에는 조선교구 제8대 교구장인 뮈텔 대주교가 순방하기도 했다.
* 순교자들이 숨어 살던 범굴은 지금은 무너져 내려서 원형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 범굴은 대구대교구의 성직자와 평신도들의 노력으로 발굴되었으며, 신자인 땅 소유주가 교구에 헌납함으로써 성지로 조성되었다. 범굴까지 오르는 산길에는 14처가 조성되어 있을 뿐 아니라 주변의 경관이 매우 수려해서 소규모 모임에서 순례하기에 좋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세 순교자가 울산으로 이송되기 전 혹독한 문초를 받은
경주 관아터(경주시 동부동 198-4 경주문화원) -
- 경주 감옥터(경주시 서부동 16번지 우방아파트 자리) -
<진목정 성지 순례 안내>
* 산내 성당에 연락 미사 가능
* 기타 사항: 50명 내외 피정 숙박 가능(취사는 자체 해결)
주차장 있음
* 교통편: 대중교통 이용 어려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