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농 성지
순교 복자들의 현양지
그들은 형장으로 끌려가는 수레 위에서 기쁨에 넘친 얼굴을 하고는 흥겨운 목소리로 기도하였다
- 어농 성지 -
* 어농성지는 을묘박해(1795년), 신유박해 당시 순교한 선조들을 기리고 현양하는 성지이다. 이곳에는 한국 교회 초기 성직자 영입을 위해 노력하였던 교회의 밀사 윤유일 바오로, 동료 밀사 지황 사바와 최인길 마티아 등 1795년에 순교한 순교 복자 3위와 1801년의 신유박해로 순교한 주문모 야고보 신부, 윤유일 바오로의 동생 윤유오 야고보, 사촌 여동생 윤점혜 아가타, 윤운혜 루치아와 정광수 바르나바 부부, 강완숙 골룸바 등 순교 복자들을 현양하기 위해 가묘가 조성된 성지이다.
* 이밖에도 어농 성지에서는 경기도 출신으로 신유박해 당시 순교한 조용삼 베드로, 최창주 마르첼리노, 이중배 마르티노, 원경도 요한, 심아기 바르바라, 정순매 바르바라, 한덕운 토마스, 홍필주 필립보 등 복자들의 시성를 위한 기도 운동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 이곳에서 현양하는 순교 복자들은 모두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 어농 성지 주문모 신부 동상 -
한국에 입국한 최초의 선교사와 1795년 부활대축일에 봉헌된
한국 교회 최초의 미사
* 주문모 야고보 신부는 1794년 2월 북경을 떠나 20여 일 후 책문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압록강의 얼음이 풀려 조선에 잠입하기 어렵게 되자, 겨울이 되기를 기다리기로 하고 10개월 동안 만주 교회를 순회하였다. 그러다가 1794년 12월 윤유일, 지황 등의 안내를 받아 의주로 입국하여 1795년 1월에는 서울에 도착하여 중국어를 잘하는 최인길의 집에 머물며 한국어를 배우고 한자를 통한 필담으로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었다. 그리고 부활대축일에는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최초의 미사 성제가 감격스럽게 봉헌되었다.
*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기까지 6년 동안 신자 수는 1만 여명으로 늘었고, 신자들을 위한 신심서 저술, 평신도들의 사도직 활동을 체계화하기 위해 명도회를 조직하는 등 헌신적인 활동을 하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떼들과 운명을 같이 하기로 결심하고 자수하여 새남터 형장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 "제가 몰래 국경을 넘는 죄를 두려워하지 않고 지황을 따라 조선에 온 것은 오로지 조선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학문은 사악한 것이 아닙니다. ...... 남에게나 나라에 해를 끼치는 일은 십계에서 엄금하는 바이므로 절대로 교회 일을 밀고할 수 없습니다"
- <추안 급국안>, 1801년 4월 17일, 주문모 중에서-
성직자 영입을 위해 헌신한 교회의 밀사들
* 초기 조선 천주교회에 중요한 역할을 한 하느님의 종 윤유일, 지황, 최인길. 그들은 성직자 없이 탄생한 조선 교회에 성직자를 모셔오기 위하여 혼신을 다하였고, 체포되어서는 포도청에서 심하게 매를 맞고 순교하였다. 1790년과 1793년에 있었던 윤유일, 지황의 북경 방문을 통하여 1794년 12월 주문모 신부가 최초로 한국에 입국한 외국인 선교사가 될 수 있었다.
* 선교사가 입국하면 남의 눈을 피해 거처할 집을 마련하는 일을 맡은 역관 최인길은 주문모 신부를 모시고 우리말을 모르던 주 신부의 통역을 맡아 성무를 집행하는 데 어려움을 덜고 우리말을 가르치는 역할도 하였다. 한 밀고자에 의해 신부의 밀입국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을 때, 그는 주 신부를 안전하게 피신시키기 위해 자신이 신부의 역할을 하다가 체포되어 윤유일, 지황과 함께 체포되었다.
*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사정없이 고문을 가하며 자백을 강요해도 그들의 믿음은 돌처럼 단단하여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체포된 지 하루도 못 되어 사정없이 두들겨 맞고 숨졌다. 숨진 세 사람의 시신은 강물에 던져졌다.
- <구베아 주교가 포교성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0월 6일자 편지> -
* 이 편지에는 1784년 이승훈이 북경 교회를 찾아와 세례를 받았으며, 조선에 교회가 탄생하였다는 기쁜 소식과 조선 교회가 처한 상황에 대하여 적혀 있다. 그리고 조선의 교우들이 북경으로 밀사를 선발하여 그 사람 편에 편지를 보내왔는데, 이 편지에 조선 교회에 복음이 전파된 과정을 자세히 보고하며, 자신들에게 필요한 영적인 도움은 사제의 파견과 새 교회에 필요한 여러 가지 양식을 보내 달라고 간곡히 요청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적혀 있다. 이 편지를 가지고 온 조선에서 선발되어 파견된 밀사의 성은 윤이고, 그의 세례명은 바오로임을 밝히고 있다.
관리들도 '유일무이의 여인' 이라며 감탄했다
* 강완숙 골룸바는 성직자 영입을 위해 경제적인 뒷받침을 하였고,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여 서울에 도착했을 때 신부를 돕기 시작하였다. 강완숙의 인품을 금방 알아차린 주 신부는 그녀를 최초로 여회장으로 임명하여 신자들을 돌보도록 하였다. 강완숙은 1801년 신유박해로 체포되어 여러 차례에 걸쳐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그녀는 온갖 고문을 받으면서도 포졸들이 지칠때까지 교리를 설명하였고, 이로 인해 더 심한 고통을 받아야만 했는데, 이러한 강완숙의 모습을 본 형리들 조차 " 이 여인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다", "유일 무이의 여인이다"라고 감탄했다. 박해자들은 사형 판결을 내리기 전에 강완숙의 죄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주교의 괴수로 각처의 남녀들을 불러들여 밤낮으로 교리를 공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교를 하기 위해 곳곳마다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강완숙은 서소문 밖 성지에서 동료 8명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 함께 처형된 동료 순교자는 강경복 수산나, 김현우 마태오, 문영인 비비안나, 김연이 율리아나, 이현 안토니오, 최인철 이냐시오, 한신애 아가타, 윤점혜 아가타이다.
- <1811년 북경 주교에게 보낸 조선 신자들의 편지> 에 수록된 강완숙 골룸바에 관한 내용 일부 -
* 조선 천주교 신자들이 북경 주교님께 보낸 편지는 1814년 8월 1일에 리스본에 도착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로 조선 교회가 처한 암울한 상황과 용덕을 드러내며 치명한 순교자들의 기록을 담고 있다. 그 가운데 "4. 강완숙 골룸바에 대한 사실"을 매우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그 마지막 부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드디어 5월 22일, 강완숙은 다른 교우 여덟 사람과 함께 환재치(사형수를 사형장에 데려갈 때 싣고 가는 수레)에 실려 서소문 밖 형장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수레 위에서 기쁨에 넘친 얼굴을 하고는 흥겨운 목소리로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형을 당하는 순간이 오자, 사형 집행관을 향하여 고개를 돌리고는 '법대로 하자면 마땅히 옷을 벗고 형을 받아야겠지만, 저희들은 부녀자들이니 부디 당관께 속히 아뢰어, 저희들이 옷을 입고 죽을 수 있게 해주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사형 집행관이 달려가 당관에게 아뢰니, 당관이 그렇게 하라고 허락하였습니다. 그러자 강완숙과 그 동료들은 서로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이윽고 강완숙이 몸에 십자가를 그은 다음 목을 내밀어 형을 받았습니다."
- 십자가 동산 -
- 청소년, 청년 프로그램 -
* 어농 성지는 2007년 9월 성지 설정 20년을 기해 청소년 성지로 선포되어 청소년, 청년, 성인 단체 또는 본당 실정과 특성에 알맞는 위탁 피정 프로그램 개발과 연구를 위한 프로그램팀이 상주하고 있어 영적 성장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어농 성지 순례 안내>
* 미사 시간: 매일 오전 11시(월요일은 예약 신청시 가능)
* 고해 성사: 미사 30분 전, 후
* 기타사항
- 식당: 130명 식사 가능
- 피정: 청소년 대상의 피정시설 있음(성인의 경우 당일 피정만 가능)
수용인원- 하절기 100명, 동절기 50명
위탁피정 및 프로그램: 30명 이상 가능
- 청소년 생태농원 운영(봉사시 봉사시간 부여)
* 교통편: 대중교통 이용시
이천터미널 앞 두미리(죽산행) 버스 이용: 오전 9시 40분, 오후 2시, 4시 40분, 6시 10분, 8시 40분
<어농 청소년 성지 고정 프로그램>
-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월례음악 피정(10시 30분-16시)
- 매월 둘째 주 토요일 부부, 가족대상 매듭미사 및 프로그램 운영(19시 30분 - 21시)
- 방학 중 청소년 대상 프로그램 운영 - 기도생활 체험학교(3박 4일), 복사학교, 기타 순교자 영성 피정
* 사진 자료 제공: 주교회의 국내이주사목위원회 성지순례사목소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