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농 성지
순교 복자 17위 현양지
* 어농성지 관련 기사: 어농성지- 첫 박해, 그리고 첫 미사
그들은 형장으로 끌려가는 수레 위에서 기쁨에 넘친 얼굴을 하고 흥겨운 목소리로 기도하였다.

어농성지는 '어농(於農)' 말 그대로 '농사짓기에 알맞은 땅'으로 박해 시대 교우들이 숨어들어와 농사를 짓고 신앙을 지키며 뼈를 묻은 거룩한 땅이다.
어농성지에는 한국 교회 초기 성직자 영입을 위해 노력하였던 교회의 밀사 윤유일 바오로, 동료 밀사 지황 사바와 최인길 마티아 등 1795년에 순교한 순교 복자 3위와 1801년의 신유박해로 순교한 주문모 야고보 신부, 윤유일 바오로의 동생 윤유오 야고보, 사촌 여동생 윤점혜 아가타, 윤운혜 루치아와 정광수 바르나바 부부, 강완숙 골룸바 등 순교 복자 17위를 현양하기 위해 가묘가 조성되어 있다.
성지 조성 배경
윤유일 바오로를 포함한 파평 윤씨 온 가족이 박해의 서슬 아래 희생된 후 200여 년 동안 그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져 족보도 없고, 또 교회 안에서는 그 후손이 전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다가 1987년에 이르러서야 후손 윤필용 씨가 나타났고 그의 증언에 따라 이곳 선산 안에서 윤유일 바오로의 부친 윤장과 그의 동생 윤유오 야고보의 묘를 확인했다.
이후 윤유일과 그의 숙부 윤현과 윤관수, 사촌 누이동생 윤점혜 아가타와 윤운혜 루치아, 그리고 한국에 들어온 최초의 외국인 사제 주문모 야고보 신부와 그의 입국과 사목을 돕다 순교한 지황 사바, 최인길 마티아, 강완숙 골룸바 등의 의묘(擬墓)[기념묘]를 만들었고, 1987년 6월 28일 수원 교구장 고 김남수 주교의 주례로 축복식을 갖고 성역화했다. 윤유일 일가 묘소를 중심으로 성지를 개발하여 2002년 8월 ‘을묘 · 신유박해 순교자 현양성지’로 선포했다. 어농 성지는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고 돕다가 치명한 을묘박해 순교자 3위와 주문모 신부를 모시고 6년 동안 조선교회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활동하다가 순교한 신유박해 순교자 14위, 모두 17위 순교자를 현양해 왔고, 이분들 모두 2014년 8월 16일 시복되었다.
(*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9.)

어농 성지 주문모 신부 동상
"제가 몰래 국경을 넘는 죄를 두려워하지 않고 지황을 따라 조선에 온 것은 오로지 조선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 <추안 급국안>, 1801년 4 17일, 주문모 신부 신문 내용 -
성직자 영입을 위해 헌신한 교회의 밀사들 - 윤유일 바오로, 지황 사바, 최인길 마티아



초기 조선 천주교회에 중요한 역할을 한 윤유일 바오로, 지황 사바, 최인길 마티아는 성직자 없이 탄생한 조선 교회에 성직자를 모셔오기 위하여 혼신을 다하였고, 체포되어서는 포도청에서 심하게 매를 맞고 순교하였다.
윤유일 바오로는 양근 대감마을 권철신 암브로시오의 제자로 교회가 창설된 지 3-4년이 지난 뒤에야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무렵 교회 지도층에서는 밀사를 선발하여 북경에 보낼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는데, 마침 성격이 온순하며 입이 무거운 30세의 윤유일이 밀사로 추천되었다. 그는 아직 신입 교우였지만 신심만큼은 동료들을 탄복시킬 정도로 성숙해 있었다. 그러므로 험한 북경 길을, 그것도 천한 상인 신분으로 왕래해야 하는데도 순순히 밀사의 임무를 받아들였다.
성직자 영입 운동이 재개된 1793년에, 이미 북경을 다녀온 적이 있는 윤유일 바오로와 지황 사바와 박 요한이 밀사로 선발되어, 함께 조선의 국경으로 가게 되었다. 지 사바와 박 요한은 조선의 사신 행렬에 끼어 북경으로 향하였고 윤 바오로는 그곳에 남았다.
역관이었던 최인길 마티아는 선교사가 입국하면 남의 눈을 피해 거처할 집을 마련하는 일을 맡았고, 주문모 신부를 모시고 우리말을 모르던 주 신부의 통역을 맡아 성무를 집행하는 데 어려움을 덜고 우리말을 가르치는 역할도 하였다. 한 밀고자에 의해 신부의 밀입국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을 때, 그는 주 신부를 안전하게 피신시키기 위해 자신이 신부의 역할을 하다가 체포되어 윤유일, 지황과 함께 체포되었다.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사정없이 고문을 가하며 자백을 강요해도 그들의 믿음은 돌처럼 단단하여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체포된 지 하루도 못 되어 사정없이 두들겨 맞고 숨졌다. 숨진 세 사람의 시신은 강물에 던져졌다.
신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천상의 기쁨이 넘친 얼굴로 순교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때가 1795년 6월 28일로 윤유일의 나이는 36세, 최인길은 31세, 지황은 29세였다. 순교 후 세 밀사들의 시신은 광희문(일명 시구문)을 지나 왕십리를 거치면 닿게 되는 살곶이다리(현 한양대학교 동쪽) 부근의 강물에 던져졌다. 이 때문에 시신을 찾을 수 없어서 현재 어농 성지의 무덤은 의묘로 조성되었다.
[일부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5월호]
강완숙 골룸바

강완숙 골룸바(1761-1801)는 성직자 영입을 위해 경제적인 뒷받침을 하였고,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여 서울에 도착했을 때부터 신부를 도왔다. 그녀의 인품을 금방 알아차린 주 신부는 강완숙 골룸바를 최초로 여회장으로 임명하여 신자들을 돌보도록 했다. 1801년 신유박해로 체포되어 여러 차례에 걸쳐 혹독한 형벌을 받았으나 극심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포졸들이 지칠때까지 교리를 설명하였고, 이 때문에 더 심한 고통을 받아야 했다. 이러한 강완숙의 모습을 본 형리들도 " 이 여인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다", "유일 무이의 여인이다"라고 감탄했다. 박해자들은 사형 판결을 내리며 붙인 강완숙의 죄목은 이러했다. "천주교의 괴수로 각처의 남녀들을 불러들여 밤낮으로 교리를 공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교를 하기 위해 곳곳마다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강완숙은 1801년 7월 2일 서소문 밖에서 동료 8명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40세였다.